친구들과 모임이 있었다. 화제는 금세 촛불과 금강산으로 갔다. 그런데 우리의 대화가 속삭임으로 변하고 있었다. 옆 좌석 말이 생생히 들리는 호프집에 모인 게 실수였다. 명색이 기자이면서 “이봐, 목소리 좀 낮춰”라고 권하고 있었다. 옆 자리의 대화도 그런 것들이었는데, 이내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적이냐 동지냐 먼저 알아야
모두가 뭔 말을 못하도록 압력을 받는다. 주변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살벌한(?) 눈치를 느끼고 있다. 속내를 잘 모른다면 우선 ‘적인가 동지인가’ 살펴야 한다. 초병의 검문을 통과하는 암호의 공개처럼. 요행히 동지라면 대화에 낄 수 있지만, 운이 나빠 적과 맞닥뜨리면 찍소리도 내선 안 된다. 여차하면 봉변을 당한다는 것은 다 알고 있다.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켜는 사람’과 ‘끄는 집단’만 세상에 있었다. “불을 밝히는 의도는 좋지만…” 정도의 화제만 꺼내도 이미 그는 ‘촛불의 적’이 된다. 반대 경우도 다를 리 없다. 촛불을 둘러싸고 적과 동지만 드러냈다. ‘초는 가졌으나 불을 붙이지 않은 사람’이나 ‘촛불을 들고 김밥에 신경 쓰는 사람’에 대한 인식은 없다. 그들에 대해 말해선 안 되고, 그들도 입을 닫아야 한다.
금강산 대화도 그렇게 흐른다. “북한군이 총을 쏜 의도가 뻔하지 뭐”라거나, “금지된 곳인데 가서는 안 되지”와 같은 피아(彼我) 구분은 금세 전선을 만든다. 아무 말 않는 것이 상책이다. “북한군의 과잉대응에 문제가 있지만…”이라거나, “우리측의 관리가 소홀했지만…”이라며 화제를 꺼냈다간 대뜸 ‘너 어느 쪽이야’하는 추궁을 받는다. 역시 뭔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한마디로 ‘끼리끼리 사회’다. 사회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지만, 자신과 다른 ‘류(類)’로 보이면 즉각 불공대천(不共戴天ㆍ한 하늘아래 같이 있을 수 없음)으로 찍는다. 지식인들이 모였다는 토론회나 공청회도 다르지 않다. 중간으로 합의와 절충을 모을 여지는 애당초 없다. 이 쪽 진지를 튼튼히 구축하고 저 쪽으로 총과 포만 쏘아대니 어느 한 쪽이 자빠지기 전엔 결론이 날 수 없다. ‘끝장 토론’도 서로의 입장만 확인하고 끝장이 난다.
언론에 소중한 경험을 토대로 충고도 한다. “내 주변 모든 사람들이 미국산 쇠고기는 위험해서 안 먹겠다고 한다”거나, “북한군이 그럴 수도 있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내 주변에서 한 명도 보지 못했다”는 식이다. 그러니 왜 촛불시위를 진압하게 내버려 두느냐, 왜 북한을 혼내라고 하지 않느냐는 항의다.
자신 주위에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스스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위세에 눌려 다른 사람이 의견을 개진할 엄두를 못 내기 때문이다. 그저 소곤소곤, 끼리끼리 소통하고 대화할 뿐이다. 저들과는 애당초 얘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끼리끼리 편 가르기의 병폐
70년대, 80년대, 혹은 그 이전엔 국민과 정부가 ‘애당초 얘기가 통하지 않는’ 사이였다. 정부가 국민 뜻에 기반을 두지 않았기에 그랬다. 문민정부 들어서야 국민과 정부가 ‘얘기가 통하는’ 사이가 됐다. 그런데 이제는 국민과 국민 사이에서 얘기가 통하지 않는 현상이 생겼다. 얘기가 안 통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서로 뭔 말을 못하게 강요하고 있다. 이 정도라면 심각한 국론분열이라 여겨도 될 듯하다.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하나만 꼽으라면 정권을 획득한 쪽의 편 가르기ㆍ끼리끼리 인사가 아닐까 싶다. 노무현 정부의 ‘코드 인사’에 이은 이명박 정부의 ‘캠프 인사’가 주된 요인이라 본다. 그들과 코드가 다르다고 여기는 국민들은 말만 하면 ‘꼴통’으로 몰렸기에 아예 입을 닫고 살았다. 요즘엔 한두 다리 건너 캠프에 실낱 같은 인연이라도 없다면 목소리를 죽이고 살아야 한다. 코드가 확산될수록 더욱 그랬고, 캠프가 넓어질수록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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