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상원이는 복덩이였다. 그가 태어나자 집안의 그늘이 사라지고 다시 햇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MBC-TV에서 <춘향전> 을 기획하여 주인공 ‘이몽룡’과 ‘성춘향’ 역을 시청자의 인기투표로 뽑았다. 운 좋게 내가 1위를 하여 ‘이몽룡’ 역을 맡게 되었다. 춘향전>
‘성춘향’ 역으로는 혜성같이 나타나 브라운관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양정화 씨가 뽑혔다. 아마도 시청자가 드라마 캐스팅을 한 경우는 지금까지 전무후무한 것 같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몇 명의 지방흥행사와 제작자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그들은 돈 되는 작품, 즉 신파나 액션물이 아니면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작가주의를 표방하는 젊고 유능한 작가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정릉 집은 그들, 젊은 한국영화인의 아지트 같았다. 영화계 신예들인 조문진, 이원세, 홍파, 조관희, 변인식 등 감독, 시나리오 작가, 평론가들이 밤새도록 술자리를 펴고 떠날 줄을 몰랐다.
1973년, <나와 나> 는 그 해 영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였다. 새한 영화사의 기획과 재무를 맡고 있던 배선환 씨가 시나리오에 반해 사재를 털어서 제작한 영화였다. 시나리오가 매우 좋았다.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는 윤봉춘 감독의 아들인 윤삼육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신예 이원세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나와>
당대 최고의 스타 최무룡 씨가 형사 역을 맡았고, 관능미의 신예 우연정이 함께 출연하였다. 이야기는 일본인을 ‘이코노믹 에니멀’이라고 욕하며 속으로는 동경하는 한국인의 단면을 고발하는 사회성 짙은 작품이었다. 내가 맡은 ‘가짜 일본인’ 역할은 꽤 흥미 있었다.
열악한 제작여건이었지만 이 감독과 나는 아무 조건 없이 승부를 걸었다. 다른 작품의 겹치기 출연도 당분간 중지하고 감독과 올인 하였다. 나는 감독과 촬영 헌팅에서 편집실까지 철저하게 함께 하였다.
마침내 영화가 완성되었다. 한 마디로 잘 만들었다. 평론가 시사 반응도 뜨거웠다. C신문사 C영화제 사무국에서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결정 됐다고 통보가 왔다. 시상식 전날 오후였다.
난생 처음 받게 될 주연상 트로피였다. 부랴부랴 시상식장에 입고 갈 옷을 준비하느라 집안이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밤 10시가 넘어 신문사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수상자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쁨에 찼던 식구들이 망연자실 주저앉고 말았다. 아내가 급히 다이얼을 돌렸다. 마침 신문사 오너의 부인이 그녀의 선배였다.
그녀가 수화기를 내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배우 S씨가 뒤집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배우 S씨가 영화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하늘을 찌를 때였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그 힘에 밀리지 않았다. 그 다음 해 1974년, 한국일보 백상 예술상에서 나에게 <남우주연상> 을 주었다. 남우주연상>
다시 신예 홍파감독 데뷔작 <몸 전체로 사랑을> 에 출연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일간지 중 신춘문예에 시나리오 부문이 있는 신문은 <서울신문> 이 유일했다. 홍 감독은 신춘문예 당선작인 자작 시나리오를 감독ㆍ제작하겠다며 집문서를 들고 충무로로 뛰어든 것이다. 서울신문> 몸>
홍 감독은 영화 <화분> 의 시나리오를 쓰며 제작 현장을 경험한 바 있었다. 그는 우리처럼 실패하지 않겠다며 구두끈을 잡아매고 전쟁터로 나섰다. 촬영지는 제주도였다. 예정된 기간은 1개월. 촬영은 <화분> 때 함께한 유영길 촬영감독이 맡았다. 화분> 화분>
출연은 김진규, 전계현, 우연정 씨. 당시로서는 내용이며 형식에서 앞서가는 시나리오였다. 신랑이 결혼식장에서 신부를 버리고 사랑하는 여자를 찾아 도망치는 라스트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홍 감독은 미국의 마이클 니콜스 감독의 <졸업> 의 라스트 신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고백했다.) 졸업>
시나리오 작가 출신답지 않게 홍 감독은 이미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집요하게 제주도의 공간과 기후를 필름에 담아내려 했다. 제주도의 날씨는 육지 사람들에게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변덕이 그야말로 죽 끓는 듯 했다. 1개월로 예정됐던 촬영기간이 2개월로, 다시 3개월로 늘어졌다. 배우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홍 감독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결국 제주도의 변덕스런 기후도, 배우들도 홍 감독 근성에 무릎을 꿇었다. 제주도의 맑은 하늘, 태풍, 변덕스러움 모두가 홍 감독의 그림 속에 밀도 있게 담겨졌다. 영화가 완성되자마자 시사를 본 연방영화사 주동진 사장이 무릎을 치며 필름을 들고 급히 싱가포르로 날았다. 18회 아시아영화제로 간 것이다. 뜻밖에 <남우주연상> 이라는 큰 상을 거머쥐고 돌아왔다. 그 때 내 나이 26세. 국내외 연기상을 쓸어버린 것이다. 남우주연상>
이원세 감독은 이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 수작을 만들었다. 홍파 감독 또한 <외출> 등 탁월한 작품을 만들었다. 배우 우연정 씨는 암으로 다리를 잘라내며 자신의 자전적 영화 <그대 앞에 다시 서련다> 에서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보여주었다. 그대> 외출> 난장이가>
1970년대 암울했던 영화계, 그 어려움 속에서도 작가주의를 표방하던 이원세, 홍파 감독, 그리고 불구의 몸을 초개처럼 던졌던 배우 우연정…. 그들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온몸으로 가난과 검열과 체제와 싸웠다. 그리고 주옥같은 영화들을 남겼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옛 영화 도시인 충무로에서도 그들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다. 2000년대, 한국 영화계는 최소한 외형적으로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거대 자본이 들어왔고 운명의 차꼬처럼 영화인들을 옥죄던 검열의 칼날도 차버렸다. 그런데 이런 시절이 언젠가 오리라고 기대하며 절망과 고독을 이겨냈던 ‘그들’의 그림자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요즘 영상자료원에서 한국 대표감독전이 열리고 있다. 김기영 감독, 이만희감독, 신상옥 감독 등등. 한국 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감독 작품들에 대한 찬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들에 대한 오마주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그런데 내 귀에는 자꾸 차마 소리 내지 못하고 흐느끼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어느 곳에선가 들려오는 그 울음소리가 내 가슴을 찢어지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름 없이 사라진 감독들…스탭들…배우들…. 우리가 미처 찾지 못한 주옥같은 영화인들. 아마 그들이 쏟아 부었던 피와 땀이 계시처럼 살아올라 이 더위에 정신 바짝 차리고 어서 제대로 된 영화 만들라고 나를 오싹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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