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 신고서 제출로 북핵 6자 수석대표 회담이 재개됨으로써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프로세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6자회담 미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베이징(北京)에서 이번 회담이 시작된 10일 “악마는 세부적 사항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s)”는 말을 했다고 한다. 대략의 원칙에 대해 합의가 됐다고 해도 뒷받침할 각론이 부실할 경우, 협상이 전체적으로 어그러질 수도 있다는 뜻일 것이다.
최악만 피해가는 '협상의 기초'
12일 언론발표문을 통해 드러난 회담 결과로 보면 북핵 신고에 대한 검증의 구체적 이행계획이 포함되지 못한 채 6자회담 산하 비핵화 실무그룹회의의 추후 협상과제로 넘겨졌다. 힐 차관보는 이번 회담의 종착점을 벌써부터 예견했던 것이다.
되짚어 보면 힐 차관보는 대북 협상에서 양보만 한다는 비판이 나올 때마다 “북한에는 제재와 압박이 통하지 않는다. 도대체 다른 대안이 뭔가”라는 식의 반문(反問)을 방어수단으로 즐겨 사용했다. 정치ㆍ외교의 영역에서 ‘주고받기’는 기본이고 ‘벼랑 끝 전술’로 일관해온 북한은 지구 상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나라라는 점을 감안하면 힐 차관보의 말이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북한에 대해 달리 방도가 없다는 체념이 협상의 기초였다는 것은 지금껏 협상 결과가 상당 부분 이 같은 대북 ‘무력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얘기로도 통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최선이나 차선은 고사하고 협상은 중간지대에도 이르지 못한 채 최악만을 피하는 형태로 굴러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우려는 진작 현실로 나타나 있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의 불법자금 문제에서 미국은 결국 북한의 요구를 수용했고, 모든 핵시설의 불능화 약속과 관련해서도 6자회담 참여국들은 영변 핵시설의 불완전ㆍ불충분한 불능화에 만족해야 했다.
비핵화 2단계 조치의 마무리인 북핵 신고가 과연 몇 점 짜리인가에 대해선 성적을 매기기가 어려울 정도다. 핵무기는 물론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핵확산 의혹 등이 흐지부지됨으로써 미국이 주문처럼 되뇌던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는 시간만 끌다가 공염불이 돼 버렸다. 이제는 플루토늄 추출량 확인을 위한 필수적 검증 대상인 고준위 핵 폐기물 저장시설 등 주요 핵시설이 신고에서 누락됐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북한은 대가로 제공키로 한 중유 100만톤 상당의 지원을 한 치의 모자람 없이 ‘모두’ 내놓으라고 당당히 요구, 10월내 이행을 완료한다는 시한까지 얻어냈다.
미측 입장에서 당초의 목표와 현실의 결과 사이의 괴리만으로 보면 낙제점에 가까운 6자회담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는 정당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것이 낫고, 북한의 과거 핵 가운데 플루토늄에 집중할 적잖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힐 차관보는 때로 화려한 언론대응 기술만으로도 위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한국도 무력감 극복 고민해야
그러나 팽배해진 무력감과 임기 말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의 서두름이 앞으로도 계속 협상을 좌우할 경우, 결과가 어떨지에 대해선 두려움이 앞선다. 북핵 협상이 핵무기에 접근해야 하는 결정적 단계로 갈수록 각론을 유야무야로 만드는 무력감은 핵무기 확인 및 폐기 문제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 될 수밖에 없다. 6자회담 무대에서의 한국의 역할 설정도 이런 고민 속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워싱턴=고태성 특파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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