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총수들이 2007년 신년사에서 강조한 경영화두는 ‘윤리경영’, ‘상생경영’이었다. 도덕성과 균형 발전을 중시해온 참여정부의 이념과 일맥 상통한다. 그런데 올해 신년사는 하나같이 ‘투자 확대’, ‘글로벌 경영 강화’, ‘공격 경영’, ‘성장동력 발굴’ 등에 초점을 맞췄다.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을 표방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부에 대한 화답인 셈이다. 당연히 올해 신년사에서 윤리ㆍ상생경영은 아예 빠지거나 후순위로 밀렸다.
하지만 어찌 보면 투자 확대나 공격 경영은 상생경영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기업이 투자를 늘려야 일자리가 창출되고, 그래야만 가계 소득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재계는 참여정부 내내 우리 사회의 ‘반기업 정서’가 투자 부진의 원인이라고 외쳐왔다. 그러다 학수고대해온 ‘친기업 정부’가 드디어 들어섰으니, 그 동안 미뤄왔던 투자를 적극 집행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셈이다.
재계의 투자 확대 다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경련은 1월 회장단회의에서 30대 그룹의 올해 투자 규모를 전년보다 19% 늘리기로 했다. 새 정부 출범 후 이 대통령이 “경제가 어려울 때일수록 과감하게 투자해 일자리를 창출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하자, 전경련은 4월 말 30대 그룹의 투자규모를 전년대비 23% 확대하고, 신규채용 규모도 18.3% 늘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촛불시위로 궁지에 몰렸던 이 대통령이 “이제는 경제 살리기의 횃불을 높이 들어야 할 때”라고 외친 3일, 경제5단체장은 기다렸다는 듯 기자회견을 열어 신규채용 규모를 당초 계획보다 10% 늘리겠다고 했다. 9일엔 30대 그룹 총수들이 다시 투자 확대와 고용 창출에 앞장서겠다는 결의문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재계가 연초 공언했던 투자와 신규채용 계획은 제대로 진행되고 있을까. 한국경제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2008년 경제전망과 정책과제’ 보고서를 보면 올해 기업들의 설비투자 증가율은 3.4%에 그칠 전망이다. 참여정부 말기인 지난해(7.4%)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또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달 매출액 상위 500대 기업의 올 하반기 신규채용 규모를 조사한 결과, 전년 하반기에 비해 3.5% 줄어들 것으로 전망됐다. 비교적 여건이 양호한 대기업들의 채용 전망이 이럴진대 나머지 기업들의 사정은 물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하반기에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기업들이 고유가와 원자재값 상승 등 경제 여건 악화에 대응하기 위해 긴축ㆍ비상경영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는 툭 하면 국민들의 반기업 정서와 정부의 과도한 규제 탓에 투자를 늘리기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하지만 우리 경제가 잘 나가던 1970~80년대, 반기업 정서나 규제가 지금보다 훨씬 심했는데도 투자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기업들이 요즘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최근 십수년 간 이어져온 세계화, 개방화의 최대 수혜집단은 바로 재계다. 주요 기업들은 수조 원씩의 현금성 자산을 쌓아놓고 있고, 올 상반기만해도 정부의 고환율 정책에 힘입어 상당한 수익을 냈다. 지금은 위기 극복을 위해 모든 경제주체가 고통 분담에 나서야 할 때다. 정부의 지원과 가계의 희생을 발판으로 성장해온 재계가 제 몫은 외면하면서 정부에 규제 완화를 요구하고 노조에 파업 자제를 당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재계는 반기업 정서가 왜 생겼는지를 자문해보기 바란다.
고재학 경제부 차장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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