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명 아이들 사연이 하나같이 구구절절해 누구부터 말해야 할지…….” 서울 구로동에 있는 소외계층 어린이 및 청소년들의 쉼터 ‘파랑새 나눔터 공부방’. 이 곳을 운영하는 성태숙(40) 교사는 “아이들 얘기를 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말문을 텄다.
“처음 왔을 때 마음의 문을 닫고 휑한 눈길로 저를 바라보던 아이들의 눈초리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요.” 이때 10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사무실 문을 불쑥 열며 들어와 “배드민턴을 함께 하자”고 선생님을 조르기 시작한다.
성 교사는 아이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며 “손님이 오셨으니, 조금만 기다리자. 그러면 선생님이 함께 놀아줄게”라고 다독인다. 그러자 아이는 함빡 웃음을 지으며 다시 밖으로 뛰어나간다. 성 교사가 아이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저 녀석과 친해지느라 무척 고생했어요. 물론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요.”
그녀가 아이들 사연을 어렵게 털어놓은 만큼이나 이곳 공부방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서울 남구로역 근처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약도까지 받아서 찾아 나섰지만, ‘서울에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있었나’ 싶을 정도로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헤매야 했다. 마치 시계 바늘이 1980년대에 멈춘 듯했다.
연립주택들이 빼곡이 들어찬 사이로 차 한대 지나기도 어려울 것 같은 좁은 골목길들이 미로처럼 펼쳐져 있었다. 30여분을 헤맨 끝에 간판도 없이 A4용지 크기 작은 나무판에 ‘파랑새 나눔터 공부방’이라고 적힌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말이 공부방이지, 외관은 남루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실내에 들어서는 순간, 건물을 보며 가졌던 선입견은 금세 사라졌다. 종달새처럼 쉼 없이 떠드는 아이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맑고 밝았다. 나무 책상에 앉아 소리 내며 동화 책을 읽고 있는 아이들. 장난감을 갖고 놀며 ‘까르르’ 웃는 아이들. 눈 씻고 봐도 그들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늘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성 교사는 “나무에 물을 주면 쑥쑥 자라듯이, 아이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쏟으면 그만큼 달라집니다. 경계하는 불안한 눈빛에 겁 먹은 얼굴로 저를 맞았던 아이들이 이렇게 밝게 자라는 모습을 볼 때마다 행복을 느낍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밝은 표정 아래에는 저마다 안타까운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다. 성 교사가 전하는 아이들의 사연을 듣고 있노라니, 애절한 슬픔이 가슴 가득 밀려와 제대로 메모를 하기가 힘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 지형(가명)이는 누나 셋과 함께 산다. 아빠는 누구인지도 모르고, 엄마도 어릴 때 지형이와 누나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집을 나갔다.
지난해 공부방에 처음 온 지형이는 피해의식이 너무 강해 마냥 울기만 했다. “지난 겨울 지형이가 공부방에 며칠 결석해 집을 가보니, 냉기가 감도는 어두운 지하 방에서 누나들과 잠을 자고 있더군요. 라면봉지와 지저분한 냄비가 나뒹구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나와 금방 뛰쳐나왔어요.”
성 교사는 거의 매일 지형이를 옆에 앉혀놓고 공부를 시키고, 따뜻한 밥을 먹이고, 얼굴을 씻기는 등 사랑을 쏟았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본 사랑에 지형이도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요즘은 공부방 친구는 물론이고 학교 친구들과도 잘 어울린다. 낯선 사람을 보더라도 경계하지 않고 밝은 얼굴로 대한다.
고교 1학년 지영(가명)이는 3급 정신지체 장애아다. 성추행을 당했던 지영이는 1년 전 이 곳에 처음 왔다. 당시만 해도 성 교사는 물론, 친구들과도 눈을 제대로 맞추지 않고 피해 다니기만 했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고, 툭하면 눈물을 찔끔거렸다. 공부방 교사들은 지영이에게 더욱 관심을 갖고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지영이도 이내 닫혔던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이제 지영이는 맏언니로서 공부방 동생들을 보살피고, 지역 독거노인들에게 매주 한번씩 도시락 배달을 하는 등 자신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있다.
성 교사가 파랑새 나눔터와 인연을 맺은 것은 운명적이다. 서울대 간호학과를 졸업한 성 교사는 나이팅게일의 꿈을 접고 대안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2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2003년 한국에 돌아온 그녀는 당초 경실련에서 운영하던 경기 광명시의 대안학교 교사로 가려고 준비 중이었다. 이 때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구로동의 소외계층 어린이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 방치돼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문득 내가 가야 할 곳이 바로 파랑새 나눔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구로동에 돌아와 버림받은 아이들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절망과 원망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희망’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어요.”
파랑새 나눔터 운영?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성 교사가 처음에 온 2003년 12월께만 해도 파랑새 나눔터는 제자리를 못 잡고 있었다. 구로지역 시민단체들이 1998년 결식아동을 돕기 위한 급식센터로 개설했다가 공부방으로 전환했으나, 외부 지원이 끊기면서 교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떠나는 등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상태였다.
“공부방 교사는 아이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인데, 교사들이 오자마자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버리니 아이들 심정이 오죽했겠어요? 부모에게 버림받은 애들이 두 번 버림받게 된 셈이지요.”
성 교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아이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고 공부방 프로그램도 갈수록 충실해졌다. 그런 와중에 한화그룹이 2005년 월드비전을 통해 지원을 시작하면서 공부방이 새롭게 탈바꿈하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됐다. 이 때부터 파랑새 나눔터에선 매주 한문, 목공예 교실은 물론, 소외계층 아이들이 가장 목말라 하는 영어교실도 열린다.
특히 해마다 어린이 1명씩을 뽑아 해외 영어연수도 보내준다. “대부분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탓에 정상적인 가정의 아이들을 무척 부러워하는데, 해외연수를 시작하면서 아이들이 더 이상 주눅들지 않는 게 너무 기뻐요.”
20여평 작은 공간에서 30여명의 아이들이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조그마한 일에도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파랑새 나눔터. 그들을 보면서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다는 동화 <파랑새> 의 교훈이 떠올랐다. 파랑새>
유인호기자 yi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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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화그룹 공부방 지원사업
올해 2월 충남 대천의 한화콘도에서 한화그룹이 지원하는 14개 공부방 교사 20여명이 모여 워크숍을 갖고 지도 학생들의 개선 사례를 발표했다. 첫 번째 발표자인 여교사가 무대에 올라 공부방 어린이들의 사연을 읽어 내려가자, 장내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분위기가 마냥 숙연했던 것만은 아니다.
어두웠던 아이들이 사랑과 보살핌으로 밝게 변했다는 얘기에는 웃음꽃을 피우며 즐거워했다. 워크숍에 참여했던 교사들은 “비슷한 처지의 소외계층 어린이들을 돌보기 때문인지, 발표자들이 전하는 사연 하나하나가 남의 얘기처럼 들리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한화가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으로 시작한 공부방 지원사업은 이렇듯 많은 사연과 함께 감동을 준다. 부모가 없는 어린 학생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 자기 자식 마냥 헌신적으로 학생들을 돌보는 교사들, 그리고 열악한 환경의 공부방을 돕기 위해 불철주야 낙후지역을 찾아 다니는 월드비전과 한화의 사회공헌 봉사자들.
그들이 있기에 우리는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한다. 한화그룹이 공부방 지원사업을 시작한 것은 단순히 돈 몇 푼 손에 쥐어주기보다는, 소외계층에게 직접 다가가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회공헌 활동이라는 판단에서다.
한화는 창립 50주년인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사회공헌 활동에 나섰다. 당시 많은 사회사업을 검토한 결과, 빈곤층 어린이들의 방과후 공간이 너무 열악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2003년부터 공부방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전국의 낙후된 공부방 90여개를 선정해 재정적 지원과 함께 연간 3,500여명의 임직원이 자원봉사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파랑새 나눔터 공부방’ 성태숙 교사에게서 “지하 급식시설이 물에 잠겼다”는 연락이 왔을 때는, 한화 자원봉사단 직원들이 한걸음에 달려가 물을 밖으로 빼내고 도배까지 해주었다.
공부방 지원사업과 동시에 빈곤층의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그 동안 500여 가구가 혜택을 봤다. 한화 관계자는 “지원 대상 공부방을 고르기 위해 전국에 산재한 수백 개 공부방을 직접 찾아가 환경이나 여건 등을 살펴보고 그 중 지원이 가장 절실한 곳을 선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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