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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전쟁쓰레기·여우소녀

입력
2008.07.14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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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 지음ㆍ왕은철 옮김/시공사 발행ㆍ528쪽ㆍ1만3,000원

/노라 옥자 켈러 지음ㆍ이선주 옮김/솔 발행ㆍ416쪽ㆍ9,500원

아시아계 미국 작가들이 한국 현대사를 소재로 쓴 소설 두 편이 나란히 나왔다.

1985년 도미 후 현지 문단에서 공고한 문학적 입지를 구축한 중국계 작가 하진(52)의 장편은 6ㆍ25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미국에 살고 있는 73세 중국계 노인 ‘유안’의 회고록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소설은 중공군으로 한국에 투입됐다가 전쟁포로가 된 젊은 시절 유안의 경험을 그리고 있다. 하진은 2004년 발표한 이 작품으로 두 번째 펜 포크너상을 받았고, 퓰리처상 최종 후보까지 올랐다.

주인공이 소속된 부대는 전쟁 경험이 없는 청년들로 꾸려진 탓에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미군에게 사로잡혀 거제 포로수용소에 감금된 부대원들에겐 또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포로수용소를 장악하고 있던 ‘왕용’의 무리에게 본국 아닌 타이완으로 갈 것을 강요 당한다. 왕용의 잔인한 고문과 협박, 포로 신분으로 귀국했을 때 받을지 모를 불이익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유안은 홀어머니와 약혼녀가 있는 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실행한다.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건조한 필치로 하진은 전쟁과 이데올로기라는 폭력적 상황에 놓인 인간의 실존적 고뇌와 결단을 냉철하게 그려낸다. 유안의 배에 ‘FUCK...U...S’라는 문신이 새겨지게 된 우여곡절은 무력한 개인을 쥐락펴락하는 이념의 부조리에 관한 블랙유머다. 출간 당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하진은 “원래 단편으로 계획했던 작품인데, 쓰다보니 인민해방군으로 복무하던 10대 시절 죽음보다 더 무서웠던 생포에 대한 공포가 절실히 배어들면서 장편 분량의 책이 됐다”고 말했다.

<여우소녀> 는 한국계 어머니와 독일계 아버지를 둔 작가 노라 옥라 켈러(43)가 2002년 발표한 두 번째 소설이다. 첫 소설 <종군위안부> 로 98년 아메리카 북어워드를 수상한 작가는 6ㆍ25전쟁 이후 형성된 미군 기지촌을 무대로 한 이 장편에서 한국 현대사 속 여성들의 고통이라는 관심사를 이어간다.

소설은 단짝 소녀 ‘현진’ ‘숙이’의 성장사를 그린다.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됐다가 돌아와 미군 매춘부로 생계를 꾸리는 엄마를 둔 숙이는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흑인 혼혈아다. 매상 좋은 기지촌 가겟집 무남독녀인 현진은 얼굴에 검은 반점을 갖고 태어났다. 아이들 놀림에 굴하지 않고 우정을 나누던 둘은 서로 다른 과정을 통해 성매매 여성으로 전락한다. 숙이는 엄마가 성병 치료소에 수용돼 있는 동안 굶주림을 면하려 몸을 팔고, 자기 출생에 얽힌 충격적 비밀을 알게 된 현진은 기지촌 호객꾼 노릇을 하는 혼혈 친구 ‘로베토’를 찾아가 매춘의 길에 들어선다.

소녀로 둔갑한 여우가 제 본성을 감추지 못하고 자기를 거둬준 농부까지 잡아먹고 만다는 ‘여우소녀’ 우화를 언급하며 숙이는 미군과의 결혼이란 지상과제를 위해 패륜도 서슴지 않는 제 삶을 변호한다. 궁핍한 처지의 소녀를 성매매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 현실은 이처럼 그녀의 본성까지 파괴하고 만다. 하지만 현진은 숙이가 버린 아이를 거두고자 기지촌을 뛰쳐나와 미국에서 불법체류자의 삶을 시작한다. 그 절박하고 처절한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인간에 대한 작가의 굳은 믿음을 내비친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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