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권 지음/푸른역사 발행ㆍ464쪽ㆍ1만8,000원
봉건과 강점의 수난 속에서 옹골찬 여성의 길을 실천한 차미리사(車美理士ㆍ1879~1955)의 평전이 나왔다. 여성 운동가, 교육 운동가, 해방 운동가로서 시대를 헤쳐 나간 그의 삶은 한국적 페미니즘의 원형을 보여주며 교육과 종교의 본령을 상기시킨다.
부모가 다섯 아이를 모두 잃고 오십줄에 들어 얻게 된 아이가 딸이었기에 그는 나서부터 ‘섭섭이’로 불렸다. 열일곱 나이에 결혼했지만 3년이 채 못돼 남편과 사별한 그가 당시 조선 여성의 비참한 처지에 눈뜨게 된 것은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23살의 나이에 유학을 떠나 중국과 미국에서 공부한 뒤 34살이 된 1912년 귀국해 교육운동에 투신, 봉건적 여성 교육에서 1925년 근대적 여성 교육의 장으로 근화여자실업학교로 거듭나게 한 그는 대다수 문맹 상태에 있던 여성들을 위한 교육을 실현했다. 60세 이던 1938년 덕성여자실업학교로 개칭, 현재 덕성여자대학의 전신을 일궈냈다.
임종 순간 “온전한 독립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유한이로다”라며 애석해 한 그는 독립 운동가이기도 했다. 70세이던 1948년 성명 ‘통일 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남북협상을 서원함’의 발표에 참여할 정도로 통일을 갈구했다. 뒤늦게 2002년 독립 유공자로 추서된 그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 받았다. “서울에 있는 한국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듣지 못하고,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한 여인이 부유하고 교육받은 남자나 여자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냈다." 평생 차미리사를 지켜보며 후견인 역할을 했던 개화파 윤치호가 일기에서 그를 평가한 대목이다.
지은이 한상권 덕성여대 교수는 평교수협의회 회장 활동, 부당 해직된 교수의 복직 운동으로 정직 3개월 중징계, 재임용 탈락, 복직 등의 시련 속에서 2000년 ‘건학 80주년 기념 덕성여대 뿌리찾기 대토론회’를 주도, 이 책으로 연결됐다. 그는 “해직을 계기로 덕성여대의 뿌리가 교육ㆍ독립 운동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족벌 세습, 친인척 비리, 만성적 학내 분규로 점철돼 온 사학의 뿌리에 독립 운동가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 8년여 동안 관련 사료를 모아 평전을 집필하게 됐다”고 밝혔다.
책은 말미에 ‘천만의 여자에게 새 생명을 주고자 하노라’ 등 차미리사가 남긴 열 두편의 글을 가급적 원문의 정취를 살려 게재, 그의 열정과 기개를 느끼게 한다. 특히 배우지 못한 부인들을 위한 야학 활동에 불만을 제기한 선교사들의 태도에 ‘현세를 하늘나라로 만들자’는 사회복음주의로 대응한 그의 일화는 종교와 사회의 관계를 반성하게 한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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