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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육포, 또는 비프 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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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육포, 또는 비프 저키

입력
2008.07.10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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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 그림자가 긴 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좀처럼 고기 맛을 보지 못했다. 특히 쇠고기는 제삿날이 아니고는 입에 댈 기회가 거의 없었다. 동네 경조사 때면 으레 돼지를 잡아 온 동네가 나눠 먹고, 귀한 손님이 오면 닭을 잡았다.

그러나 소는 임의 도축이 금지돼 있기도 했지만, 당시 농가의 동산목록 제1호였다는 점에서 감히 손 대려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신 더러 벼락에 놀라 혼이 나가거나 이상증세를 보이는 소가 나오면 쇠고기 잔치가 벌어졌다. 집집마다 한 덩어리씩 살코기를 나눠 갖고, 소 값을 분담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냉장고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때였다. 구워서, 지져서, 국을 끓여서 순식간에 해치워야 했다. 평소에 그렇게도 귀하던 쇠고기를 한꺼번에 먹어 치우는 게 여간 아깝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로부터 ‘육포’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6ㆍ25 피란 도중에 폭격 맞아 쓰러진 소를 해체해서 강가에서 말려 만들었는데, 날로 씹어 먹든, 구워 먹든, 끓여 먹든 맛이 기막혔다는 얘기였다. 그 맛이 참으로 궁금했지만 제대로 즐기게 된 것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였다. 흔히 술과 안주의 궁합을 말하지만, 육포는 만능 안주였다.

■가장 인기를 끈 것이 ‘텐구(Tengu)’ 육포다. 고기 비린내가 나지 않고, 짜지도 싱겁지도 않다. 설탕이나 후추 등으로 알맞게 맛을 내 육포 특유의 풍미를 살렸다. 흰 콧수염과 턱수염, 구레나룻이 달린 뻘건 얼굴에서 코가 길게 뻗어 나온 가면을 그려 놓은 듯한 상표다. 일본 민간신앙에서 우리의 산신령과 비슷한 존재인 ‘텐구’(天狗)를 상표로 삼은 것이지만, 국내에서는 큰 코만 떠올리면 기억할 수 있도록 ‘코주부 육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아예 ‘코주부’라는 상표를 단 국내산 육포가 나온 것도 ‘텐구’ 육포의 오랜 인기를 일깨운다.

■일본식 상표명 때문에 ‘텐구’ 육포를 일본산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산 칼로즈(Calrose) 품종 쌀 가운데 ‘고쿠호(Kokuhoㆍ國豊)’라는 상표는 일본계 미국인 회사에서 만들었지만 일본산 쌀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텐구’ 육포는 캘리포니아에서 가공ㆍ생산되는 비프 저키(Beef Jerky)다. 당연히 미국산 쇠고기를 원료로 해서 만든다. 쇠고기 파동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 와중에도 ‘텐구’ 육포의 인기에는 변함이 없다.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 쇠고기라면 날고기를 말린 ‘텐구’ 육포의 위험성을 라면 수프에 비할까.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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