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라고 늘 가르쳤다. 밥상머리에서 떠들어 대거나 어른 말씀에 토 다는 것은 가정교육 잘 못 받은 가장 대표적인 경우며, 말 많은 사람이 경망스러움의 대명사가 된다. 이 같은 분위기가 지배적인 우리나라에서 토론문화가 정착되기란 사실상 힘들다고 흔히 말한다.
굳이 시사 토론과 같은 정통 토론 프로그램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미국의 오프라 윈프리나 제이 레노가 진행하는 토크 쇼 형식의 대담 프로그램 도입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별 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던 것 역시 우리의 척박한 토론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가십이나 근거 없는 루머 그리고 실제 여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 소위 ‘~카더라 방송’이 범람하는 것 역시 일정 부분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여론이 수렴되는 토론문화가 부재한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미국 쇠고기수입 협상 정국은 텔레비전과 인터넷 등을 통한 토론프로그램과 토론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회적 관심의 집중과 시민 참여의 확대는 MBC <100분 토론> 같은 프로그램에서 전화 토론자나 방청객 중에서도 ‘광주 양선생님’, ‘고대녀’ 등 스타 논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미디어를 통한 공공저널리즘의 확대라 할 수 있다.
외국의 한 언론학자는 공공저널리즘이 “언론인들이 시민을 뉴스거리나 구경꾼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공중으로, 그리고 시사적 문제에 대한 잠재적 참여자로 간주하며 문제를 아는 데 그치지 않고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을 모색하는 데 기여한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시사 토론 프로그램은 합리적 혹은 비합리적인 방식, 이성 혹은 감성을 통한 설득으로 시민들 간의 합의를 도출해 낼 수 있도록 조직되는 공공토론의 형식을 지닌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한 과정이다.
TV토론 프로그램은 미디어를 통해 정치 공론장과 미디어 공론장 그리고 시민 영역을 연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공 저널리즘으로서 정치영역과 시민영역을 연결하는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이 지금까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사실 텔레비전은 합리적 정보 전달의 매체는 아니다.
텔레비전은 사람들이 정보를 접하는 최초의 창구이긴 하지만 영상매체로서 지니고 있는 감성적, 미학적 논리와 단순화의 논리가 정보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사토론프로그램이 언제나 진지하고 합리적일 필요는 없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위를 최대한 활용한다든지, 상대방을 화나게 만들어 올바른 판단을 방해 한다든지 혹은 인신공격의 최후의 수단으로서 토론을 이용하는 등, 쇼펜하우어가 역설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토론술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21년 전인 1987년 10월 KBS1의 시사토론 프로그램 <심야토론> 이 첫 전파를 탔다. 그 후 몇몇 프로그램이 부침을 거듭하고 <100분토론>, <시시비비> 등이 방영되면서 스타 진행자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미디어 토론문화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시시비비> 심야토론>
또 최근 케이블TV채널 XTM이 <백지연의 끝장토론> 이라는 토론 프로그램을 새로 시작,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진행자의 유명세와 케이블TV가 지닌 상대적인 자유로움으로 유연한 형식의 토론 형식을 선보이고 있다. 백지연의>
그렇다고 해서 시사토론프로그램의 수준이 형식의 신선함이나 프로그램 진행자 특유의 힘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시사토론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서 합리적 의사소통의 주요한 장으로서 기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