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의 정치에서 크게 다른 것 중 하나가 비례대표 국회의원 제도다. 미국에는 한국과 달리 비례대표란 제도가 없다. 국회의원은 누구나 한 지역을 대표하는 선량이지, 지역구가 없는 국회의원이란 미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다. 원래 비례대표의 취지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뽑아 국회 운영에 도움을 주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비례대표는 흔히 돈으로 국회의원 배지를 사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 존엄성도 거의 사라졌다.
미국에서는 지역구의 예비선거를 통해 공천을 받기 때문에 의원들은 주말이면 의례 지역구 관리를 위해 귀향한다. 자연히 주말의 워싱턴 정치가는 무척 한산하다.
지역구에 돌아가면 일정이 빡빡하게 차 있다. 시민단체나 이익단체 관계자들과 면접 또는 대화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지난 한 주일 동안 워싱턴에서 있었던 일들과 통과된 법안들, 또는 상정 예정 법안들에 대해 지역 대표인 국회의원으로부터 설명을 듣기 원하고, 이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어려운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에 대비해 의원들은 지역구에 돌아가기 전 밤을 새워 답변을 준비해야 한다.
내게 가장 힘들었던 그룹은 교원협회(Teachers Association)였다. 이들은 대개 강한 반 보수, 반 공화당 성향이다. 비싼 사립 중ㆍ고등학교는 부잣집 자녀들을 위한 특별 교육기관이라고 공격하면서, 자기 자식들을 사립학교에 보내기보다는 공공 교육비를 더 부담하길 원한다. 한국의 전교조 같은 극단적인 집단은 아니지만, 나는 그들 앞에 설 때면 늘 불친절한 눈초리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이 공화당의 단 한 명 뿐인 동양계 출신인 나를 환영할 리가 없었고, 나는 항상 질문 세례를 받기 일쑤였다.
그들은 내가 왜 어떤 특정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는지 크게 실망했다면서 답변을 요구하곤 했다. 그러니 공부를 안 할 수 없다. 연방 하원의원 한 명에 대개 16명 내지 20명의 보좌관이 배정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나도 16명의 보좌관을 두었는데, 모두 분야별 전문가들로 8명은 지역구 사무실에, 나머지 8명은 워싱턴 사무실에서 연구조사를 수행했다. 이들은 가령 국방, 교육, 교통, 사회복지 등 분야를 각각 맡아 나를 보좌하며, 지역구에 돌아가서 답변할 수 있도록 연구자료들을 뽑아주기도 한다.
지역구민들 앞에서 질문에 답변을 못하거나 회피하면 당장 그 이튿날 지역 신문 1면에 내 사진이 크게 난다. 가장 힘든 것은 대학교 캠퍼스를 방문할 때다. 미국 역사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진땀을 빼곤 했다. 그래서 틈틈이 비행기 안에서 줄곧 미 역사책을 여러 번 되풀이 읽어야 했다. 가장 좋을 때는 한인 교포들의 모임에 갈 때다. 전혀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고 까다로운 질문시간도 없고, 대개가 상호 친목을 나누는 우정의 모임들이었다. 이럴 때는 간단한 축사 한마디로 충분했다. 나머지 시간은 대개 주최 측 대표들의 연설을 듣는 시간이었다.
중국 교포들의 모임도 대개는 마음이 편안한 주로 먹고 마시는 자리다. 한번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화교(한국에 살았던 중국인)들의 모임에 참석했다. 한 사람이 다가오더니 어여쁜 여자의 사진을 보여 주면서 “이 애가 내 딸인데 한국서 지금 인기 최고야, 얘 몰라? 아니 우리 딸 ‘주현미’ 몰라?” 한다. 이름이 익숙치 않아 얼떨떨해 하는 내게 누군가 귓속말로 그의 딸이 바로 유명한 한국의 가수 ‘주현미’ 라고 속삭였다. 딸의 사진을 품 속에 넣고 다니며 자랑하는 주름이 유난히 많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나는 그의 두 손을 덥석 잡고 “주현미를 모르는 한국 사람이 어디 있느냐, 정말 훌륭한 딸을 두셨다”고 했더니 그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한국 출신 화교들은 미국에 와서도 다른 중국 대만 홍콩의 주류사회에 못 들어가고 대개는 다시 한국 교포들을 상대로 중국 식당을 운영한다. 한국에서 태어난 경우도 많은데, 어찌 보면 이들은 불쌍하다. 한국에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알몸으로 미국에 건너와 결국은 다시 자장면 식당을 한다.
남부 텍사스 출신인 동료 의원 하나는 워낙 면적은 넓고 인구밀도는 낮은 지역구를 돌아다니기 위해 자동차 대신 경비행기를 이용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 지역구는 다행히도 로스앤젤레스와 오렌지 카운티가 연결됐기 때문에 차로 두 시간이면 충분했다.
지금도 나는 지역구가 없는 대한민국 국회의 비례대표 의원들은 매일 무얼 하나 궁금하다. 주말에 돌아갈 지역구가 없으니 당연히 지역구 관리도 필요 없고, 지역구에 돌아가 주민들의 요청이나 질문에 땀을 흘리며 답변할 일도 없으니 세상에 이처럼 편한 국회의원이 있을까 부럽다.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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