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명의 배우들이 극장 안에 촛불을 켰다. ‘이것은 또 하나의 굿이다’라는 부제를 달고 셰익스피어의 <맥베드> 를 제의극으로 옮겨 놓았다. 굿이라면 척사(斥邪)와 진혼, 정화를 지향할 터. 무엇을 쫓아내고 무엇을 달래며 무엇을 깨끗이 하는가. 맥베드>
원작은 한 인간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욕망 추구와 양심의 추적 사이 극한적 겨루기를 담고 있다. 불행한 시대와 만나 (쿠데타 같은 경위로) ‘자기 것 이상의 것’을 갖게 된 권력자 내면의 불안과 말로를 읽게 된다.
2006년 <지상의 모든 밤들> 로 성매매 여성들의 일상과 이면을 섬세한 필치로 그린 바 있는 김낙형이 극시로 바꿔 쓰고 연출했다. 지상의>
이 연극은 일면 배우들의 자기 정화 과정처럼 보인다. ‘몸’과 ‘말’로 세계를 옮기는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내림굿을 보고 있는 듯도 하다. 공연 내내 움직이는 몸과 요동치는 시어로 예리한 칼날 위를 걷고 있는 느낌이다.
세속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배우들은 촛불처럼 극장 안 한 시간 반, 자신들을 소진해 인간성의 어둔 부분과 극장 밖 현실 속 횡행하는 폭력들을 정화한다.
제의 공간은 마룻바닥과 걸상, 책상, 칠판을 대신하는 캔버스가 전부인 교실이다. 이 극단은 전작 <나의 교실> 을 통해 ‘교실’의 사회학적이고 병리학적인 공간성에 주목한 바 있다. 작업자에게 연극은 세상을 배우는 학교요 극장은 교실일 것. 나의>
그러나 이 교실은 계몽의 장소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 역사 속 폭력의 기억을 복기하는 곳이며 연극행위라는 자기 소명을 복습하는 장소다. 폴란드 실험연극인 칸토르의 <죽음의 교실> 이 그러했듯 말이다. 죽음의>
권력을 향한 야망을 끝 간 데까지 밀어붙였던 맥베드와 그의 부인은 읊조린다. ‘견딜 수 있을 줄 알았지.’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한 이들이 설령 폭력의 연쇄성을 견뎌낸다 해도 그들에겐 대사처럼 ‘안정과 명예, 마음 깊은 곳의 존경과는 인연이 없으며 뿌리 깊은 저주와 속 빈 순종만이 남을 뿐’이다. 권력자의 베갯머리는 달아난 잠으로 괴롭다.
‘우리는 오직 예술을 통해서 가장 확실하게 세계를 회피할 수 있으며, 또한 오직 예술을 통해서 가장 확실하게 세계와 결속될 수 있다.’ 괴테가 옳았다.
동시대와 먼 배경이면서도 극장 밖 현실을 일깨우는 이야기, 이미지를 다지는 시적 대사의 힘, 배우의 몸 그 상연성이 주는 전율, 익숙한 오브제를 변형시켜 다양한 의미를 발생시키는 무대 표현, 고전에 담긴 높고 깊은 인간 조망권의 확인 등 보는 이의 마음을 수런대게 하는 연극이다. 극단 죽죽, 스튜디오 76, 8월 3일까지.
극작ㆍ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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