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처음 잠을 잔 게 열아홉 살 세밑이었다. 신촌의 허름한 여관에서였다. 잠을 잤다는 말은 정확치 않다. 나는 그 밤 한숨도 못 잤으니까. 여자(A라 하자)는 잠깐 눈을 붙였(던 것 같)다. 통금이 해제되고 한 시간 뒤쯤, 우리는 여관을 나왔다.
어둑새벽이었다. 우리는 로터리 쪽으로 잠시 걷다가, 신촌시장의 밥집으로 들어가 선지해장국을 시켰다. 내 기억이 옳다면, 그 시절 신촌시장의 해장국 값은 400원이었다.
그 때, 우리는 만나기 시작한 지 다섯 달 남짓 된 터였다. 나이는 A가 한 살 위였다. 식당을 나서자, 처마에 알전구를 매단 점포들이 하나둘 문을 열고 있었다. 어둑한 거리를 달려가는 차들의 미등 저편에서, 서울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신촌로터리 한 가운데에 시계탑이 서 있던 시절이었고,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기 한참 전이었다. 버스로 그녀를 바래다준 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열아홈 세밑… 허름한 여관… 한숨도 못잔 그 새벽
이듬해 봄까지 A와 예닐곱 번쯤 더 여관을 찾은 것 같다. 그 때마다 다른 여관이었으나, 죄다 신촌에 있었다. 내가 그녀와 만나 함께 논 곳이 주로 신촌이었으므로. 여관에 든 뒤의 과정은 늘 같았다. 우리는 섹스를 했고, 얘기를 나누다가 그녀는 눈을 붙였고, 나는 한숨도 안 잤다.
우리는 어둑새벽의 신촌시장에서 해장국을 먹었고, 나는 그녀를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었다. 한 번은 버스를 타지 않고 그녀의 집까지 일부러 에돌아 걸어서 갔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는 자색(紫色) 하늘에 별이 총총했던 맑은 새벽이었다.
나는 그녀의 거처에서 멀찍이 떨어져 그녀가 열쇠로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걸 지켜보곤 했다. 혹시라도 그녀의 하우스메이트들과 얼굴을 마주칠까 두려웠으므로. 바닷가가 고향인 그녀는 신촌로터리에서 버스로 다섯 정류장 떨어진 곳에서 친구 둘과 자취를 하고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뒤 우리는 갈라섰다. 그녀가 그러기를 원했다. 다시 말해 나는 차였다. 그녀를 향한 내 열정은 여전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열정이 식는 데 한 해가 더 걸렸다. 그 동안 나는 ‘병닭’ 같았다.
그로부터 16년 뒤, 내게 또 한 번의 열정이 찾아왔다. 그 때 나는 기혼자였으므로, 이번엔 비윤리적인 열정이었다. 비윤리적이었든 어쨌든, 그것은 내가 살아오며 겪어본 열정 가운데 가장 드셌다.
미친 사랑이라고나 할 만한 열정. 자나 깨나, 떨어져 있을 때나 함께 있을 때나, 내겐 그녀(B라 하자) 생각밖에 없었다. 그녀는 내 전부였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나 자신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미친 사랑은 석 달 남짓밖에 이어지지 못했다.
이번에는 내가 물러섰다. 그 열정의 불이 내 세속적 실존과 가족을 다 태워 허물어뜨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실 그럴 조짐이 보였다. 나는 비겁했다. 그리고 이기적이었다.
16년 전과 달리 야간통금이 없는 시절이었으므로, B와 나는 자주 밤새 걷다가 어둑새벽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그리곤 몇 시간 뒤에 또 만났고, 어둑새벽이 될 때까지 붙어있었다. 어둠 속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도시의 낮과 밤이, 저녁과 새벽이 얼마나 다른지 알리라.
어둑새벽의 신촌, 어둑새벽의 원효로, 어둑새벽의 한강은 햇빛 속의 서울과는 아주 다르다. 어둠의 정령 운운할 생각은 없지만, 도시의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같은 것이 느껴진다.
B는 매혹적인 수다쟁이였다. 말하는 것 자체로 내게 그렇게 큰 즐거움을 준 이는 B밖에 없다. 그녀의 말은 간질임이었고, 유혹이었고, 도발이었다. 그녀와 얘기하는 것은 그녀와 섹스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것도 전위적인 섹스를. 그녀는, 나쁘게 말하면 변덕스러웠고, 좋게 말하면 ‘무한생기발랄’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옥타브를 넘나들었고,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희로애락애오욕을 오갔다. 그녀는 깔깔댔고 흐느꼈고 빙긋거렸고 뾰로통해졌고 기쁨에 겨워했고 투덜거렸다.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나는 늘 ‘하이(high)’ 상태였다.
16년뒤 다시 찾은 새벽, 환희와 신비였던 시간
나는 젊어서부터 생활이 불규칙했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때 이른 나이에 출근 생활을 접은 이유 가운데 큰 것이 이 불편한 체질에 있다. 젊어서도, 요즘처럼, 어둑새벽에 깨어 있을 때가 많았다.
동이 틀 무렵 겨우 잠이 들어, 이내 일어나 출근을 해야 하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어둑새벽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B와 서울거리를 걸을 때, 어둑새벽은 환희의 시간이었고, 신비의 시간이었다.
B와 멀어진 뒤에도, 어둑새벽은 더 이상 고통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 즈음 나는 출근생활을 접었기 때문이다. 이젠, 어둑새벽에 깨어있는 것이 불편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가족과 함께 한 외국도시로 이주했다. 그 도시에 살며 누린 胄탓?가운데 큰 것 하나는 걷기였다. 특히 어둑새벽에 걷기.
크리스토프 라무르가 <걷기의 철학> 에서 내린 정의에 따르면, 산책은 우연에 내맡긴 걷기다. 산책자는 오로지 즐거움을 위해 정처 없이 걷는다. 서두르지 않고, 한가로이, 다가오는 느낌들에 자신을 내맡긴 채, 산책자는 순간의 광경들을 음미한다. 산책자에게는 약속이 없다. 그는 누구에게도 얽매여 있지 않다. 걷기의>
그 도시의 어둑새벽을 걷는 내가 그랬다. 내겐 목적지도 없었고, 약속도 없었다. 어둑함이 어스름으로, 어스름이 희붐함을 거쳐 환함으로 바뀔 때까지 발 닿는 대로 걷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자 약속이었다.
가까이에 아무도 없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나는 걸으면서 흘러간 한국 가요를 흥얼거리곤 했다. 간혹 사람과 마주치면 ‘본 뉘’(굿나이트)나 ‘본 주르네’(굿데이)를 주고받았다. 그것은 우애를 가장한 위선이기도 했고, 서로 경계심을 푸는 책략이기도 했다.
걷다가 다리가 아플 때쯤이면 신문가판대들이 하나둘 문을 열기 시작한다. 나는 조간신문을 한 부 사들고 아무 카페에나 들어간다. 그리고는 칼바도스나 코냑을 한 잔 시킨다. 진한 브랜디 맛을 음미하며, 나는 신문을 뒤적인다. 베껴서 서울에 팔아먹을 기사가 없나 살핀다.
충분히 다리를 쉰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카페가 집에서 너무 멀 땐 지하철을 타고, 그리 멀지 않을 땐 다시 걸어서. 식구들은 그 때까지 자고 있거나 막 일어난 참이다.
낯선 도시서 생각나 되뇌인 그녀들의 이름
그 도시의 어둑새벽을 걸으며, 나는 이따금 A를 생각했다. 신촌의 어둑새벽을. 그보다 좀 더 자주, 나는 B를 생각했다. 원효로의 어둑새벽을. 그들의 기억은 장년 사내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걷다가 그들 생각이 나면, 불쑥 그들 이름을 불러보기도 했다. “A야, 잘 사니?”, “B야 건강하니?”
A와 갈라선 뒤, 딱 한 번 그녀를 만났다. 7년만이었다. 그 전엔 우연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가 내 직장으로 전화를 했다. 그녀는 내게 깍듯이 말을 높였고, 나 역시 어색함을 억누르며 말을 높였다.
우리는 도심의 한 호텔 일식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A는 며칠 뒤 결혼한다고 했다. 왠지 나를 만나 그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는 것이었다. 그녀보다 먼저 결혼한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귀띔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말렸음에도, 그녀는 극구 저녁값을 치렀다. 우리가 갈라선 날 저녁값을 내가 치렀다는 걸 상기시키며. 그 날 저녁값은 7년 전 저녁값의 열 배는 됐을 테다. 우리는 그 날 여관에 들지도 않았고, 어둑새벽의 시장을 찾지도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막차가 끊기기 전, 11시쯤 나는 그녀와 헤어졌다. 바람결에 요즘도 가끔 그녀 소식을 듣는다. 둘째 아이가, 딸인데, 올해 대학엘 들어갔다는 얘기도 들었다. 졸업반인 내 둘째 아이가 다니는 학교다. 그 아이들이, 우연히라도, 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B와 헤어진 뒤, 나는 그녀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헤어지고 얼마 뒤 전화 통화는 두 차례 했다. 10여 년 전부턴, 바람결에도 그녀 소식을 듣지 못했다. 나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되뇐다.
생활의 불규칙과 불면증은 여전하므로, 나는 요즘도 이따금, 정말 이따금, 어둑새벽의 서울을 걷는다. 그러면서 이따금, 정말 이따금, 30여 년 전, 15년 전 이 도시의 어둑새벽을 생각한다.
푸르디푸른 나이의 나를 생각하고, 꺾이기 직전 나이의 나를 생각한다. 자연히, A 생각과 B 생각이 따른다. 그들과 그들 가족에겐 결례이겠으나, 생각나는 것 자체는 어쩔 수가 없다.
그건 그렇고, 아내는 나말고 몇 남자(또는 여자)에게나 열정을 느껴봤을까? 아니, 몇 남자 또는 여자와 열정을 실천해 봤을까? 하나보다는 많고 넷보다는 적었으면 좋겠다. 그쯤 돼야 공평할 테니까. 하나도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많은 편이 낫겠다. 그래야 내 맘이 편할 테니까.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삽화=신동준기자 dj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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