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린 맥마흔 지음ㆍ윤인숙 옮김/살림 발행ㆍ712쪽ㆍ3만원
헤겔은 “역사는 행복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프로이트는 “행복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다”라고 규정했다. 미국의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행복을 낙관하는지, 행복하려면 무엇을 해야하는지 등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 방식이 시대ㆍ문화에 따라 뚜렷이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원제인 에서 자신이 정관사(the) 대신 부정관사(a)를 썼다는 점, 즉 책에 기술된 내용이 ‘행복의 역사’의 한 지류일 뿐임을 강조하면서 저자는 행복을 사상사-엄밀히 말하면 서구사상사-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서구에서 행복은 하나의 사상으로 작용해왔다. 행복은 특별한 이유들로 인해 서구의 상상력에 매우 강한 위력을 발휘해온 개념이자 열망이었다.”(9쪽)
책에 따르면 행복은 평등한 것이며, ‘지금, 여기’의 삶에서 추구할 권리라는 지금의 행복관이 형성된 것은 계몽의 시대였던 17, 18세기였다. 그 과정은 점진적이었다. 먼저 소수 엘리트에 의해 사회적 권리로서 논의되던 행복추구권은 미국과 프랑스에서의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18세기 말엽엔 자명하고도 보편적인 권리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현대적 행복관의 연원을 찾아 저자는 그리스ㆍ로마 철학, 유대ㆍ기독교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에서 행복은 신의 선물(혹은 분노)로 여겨졌다. 거듭되는 전쟁ㆍ돌림병ㆍ굶주림, 영문을 모른 채 공포를 자아내는 자연현상은 사람들에게 삶이란 통제 바깥의 힘에 의해 지배되는, 추구하기보단 견뎌야할 것이란 인식을 심었다. 부와 권력을 거머쥔 왕 대신 한창 나이에 전사한 평범한 남자를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지목한 아테네 현자 ‘솔론’의 이야기는 이렇게 이해된다.
기독교의 행복은 구원을 위해 기꺼이 감내하는 고통과 동일시됐다. 로마의 기독교 개종 금지법을 어긴 신도들은 원형극장에서 맹수들에게 물어뜯기면서도 환희 섞인 침착함을 잃지 않아 관중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내세의 지복(至福)을 염원하며 현세의 고행과 박해를 기꺼이 견딘 초기 기독교도들의 전통은 서구 행복의 역사에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18세기 유럽인들은 물질적 풍요를 배경으로 재미의 추구를 신에 대한 반항이 아닌, 자연의 순리에 충실한 삶으로 여기는 인식의 전환을 이뤄낸다. 오늘날의 행복은 노란 원형 얼굴에 웃음 머금은 입매를 가진 아이콘 ‘스마일리’가 대변한다. 1963년 무명의 광고업자가 만든 이 아이콘이 전세계 온갖 물품을 장식하는 행복의 상징으로 발돋움한 것은 행복에 대한 현대인의 문화적 열망을 보여준다.
헤로도토스ㆍ아리스토텔레스부터 로크ㆍ루소를 거쳐 마르크스ㆍ프로이트까지 섭렵하며 풍성한 인문학적 지식을 선사하는 이 책은 행복 증진을 위한 유전자 조작에까지 손뻗치려 하는, 행복 추구사의 오늘날 추이를 우려스럽게 바라본다. “완전한 행복이라는 성배 …그 고귀한 신화적 유물처럼, 해방의 잔이며 우리의 고통을 지탱할 성배도 오직 우리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인지 모른다.”(6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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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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