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에는 불황이 없다.’ 적어도 백화점 발표 자료에 따르면 그렇다. 하지만 요즘 럭셔리 업계의 표정은 밝지가 않다. 올해 초 유로화 급등으로 앉아서 30억~40억원씩 환차손을 보는 마당에 호경기가 무슨 소리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백화점 업계가 “사상 유래 없는 호황”이라고 떠들어온 명품불패 신화,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 백화점 명품은 날았다는데
백화점들이 지난달 30일 발표한 여름 정기세일 첫 주말(6월 27~29일) 실적은 소비 양극화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롯데는 지난해 여름세일 첫 주말(7월 6~8일) 대비 명품 매출이 무려 58% 신장했다고 밝혔다.
신세계와 갤러리아도 각각 50.2%, 43% 늘어났다. 이들 백화점의 전체 매출 신장률이 적게는 12%(롯데)에서 많게는 16.9%(신세계)인 것을 감안하면 명품군의 가파른 신장세는 더욱 두드러진다. 올해 2분기 소비자심리지수가 외환위기 이후 최악이라는 한국은행 발표(지난달 25일)가 무색할 정도다. 업계 관계자조차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수치”라고 말한다.
■ 실제는 환차손, 매출 부진에 울상
명품업계의 현실은 매출 수치와 큰 차이가 난다. 루이비통, 구치 등 일부 잡화브랜드가 호경기임은 분명하지만, 대부분의 의류수입 업체는 “2000년대 들어 이렇게 어려운 적은 처음”이라고 말한다.
이탈리아 유명 브랜드를 수입ㆍ판매하는 A사 임원은 “여름 정기세일 매출은 최소한 10% 이상, 영업이익은 그보다 큰 폭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며 “가을ㆍ겨울 시즌은 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업계에 파다하다”고 전했다.
럭셔리 패션업계가 고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유로화 급등에 따른 환차손 탓이다. 보통 수입업체는 봄 상품의 경우 그 전해 5~9월 발주하지만, 실제 물품대금을 치르는 시점은 상품이 도착한 시점인 올해 1~3월께. 이 기간 환율이 상승하면 예상치 못한 환차손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이달 말 시중에 깔리는 가을ㆍ겨울 상품은 지난해 11월 발주, 환율 급등에 따른 환차손 액수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경기 침체로 소비심리가 위축되면서 가방이나 지갑은 구입해도 의류 지출은 상대적으로 줄이는 것도 이유다. 롯데백화점 에비뉴엘의 올해 1~5월 매출구성비를 보면 잡화부문은 68.5%로 2.5%포인트 신장했지만, 의류부문은 20.3%로 오히려 3.6%포인트 떨어졌다.
■ 급신장 배경은 신규 출점과 매출찍기 관행
백화점 명품 매출과 명품업계의 괴리가 큰 이유는 뭘까. 업계는 “백화점 명품 매출이 세(勢) 과시는 되겠지만 무의미한 수치”라고 말한다. 신장률은 기본적으로 전년 여름 세일기간과 일수만 맞춰서 집계, 신규 점포나 신규 브랜드 입점 같은 중요 변수는 무시된다.
예컨대 롯데는 지난해 12월 신규 오픈해 그 해 여름세일 매출에 포함되지 않았던 부산 센텀시티점 매출을 통째로 올해 집계에 반영했다. 세일 직전인 지난달 20일에는 최근 50% 이상 매출 신장세를 보이고 있는 루이비통이 입점, 구매심리를 한껏 자극했다. 루이비통은 에비뉴엘 매장에서만 월 39억원 어치(3월 기준)를 팔아치우는 메가브랜드다.
신세계도 비슷하다. 지난해 본관 리뉴얼로 매출이 불안정했지만, 올해는 안정화가 이루어진 데다 지난해 말 죽전점에 루이비통이 입점했다. 갤러리아는 대전 타임월드점을 지난해 8월 150평에서 400평으로 확장하고 디올 셀린느 에뜨로 루이비통 페라가모 코치 등을 새로 입점시켰으며, 본점에도 올 들어 11개의 신규 브랜드가 입점했다.
유로화 상승분도 매출에 반영된다. 롯데 에비뉴엘에 따르면 명품 브랜드들이 4월께부터 국내 판매 가격을 10% 가량 인상했다. 일부 명품 의류업체는 매장 유지를 위해 ‘매출 찍기(매출을 늘리기 위해 자사 제품을 구매하거나 구매한 것처럼 매출전표를 구성하는 것)’에 나서기도 한다.
수입 잡화업체 B사 대표는 “매출이 떨어지면 백화점이 떼가는 수수료도 줄어든다”며 “당연히 백화점은 매출을 일정액 이상 유지하라고 요구하고, 업체 입장에선 가짜 매출을 일으켜서라도 퇴출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백화점 매출은 높아도 업체는 속병을 앓는 이유다.
이처럼 백화점이 세일 때마다 발표하는 명품 매출 실적이 무의미한 수치임에도 불구, 지식경제부가 매달 발표하는 ‘주요 유통업체 매출동향’의 근거자료로 활용되는 것도 문제다. 업계 관계자는 “어쩌면 명품 매출 수치가 백화점들이 양극화를 당연시하면서 해외 브랜드 비중을 강화하고 귀족마케팅에 나서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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