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정치교수(폴리페서)’문제가 소란한 거리 정치와 더불어 여전히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두환 정권이 도입한 제도가 여야의 합의 하에 민주화 시대에도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셈이니, 보수나 진보 진영이 그 제도만은 ‘민주적인’ 요소로 여론에 관계없이 지키겠다는 강력한 신념을 모처럼 공유한 것 같다.
정치교수 논란의 바탕에는 직업윤리의 문제와 더불어 지식인의 실천의지, 명예욕, 이기심, 일반인의 비난과 부러움의 공존 심리, 나아가 근본적인 삶의 불안 등이 깔려 있음이 사실이다. 어쨌든 근본적인 쟁점은 학문과 정치의 겸업 가능성 여부에 귀착될 것이며, 나아가 지식인의 사회적 실천의 본질이 무엇이냐의 문제로 이어진다고 할 것이다.
물론 교수직에 있다가 그 직을 떠나 공직에 나아가거나 현실정치에 관여할 수 있다. 삶의 여정에서 아름다울 수도 있는 자유로운 변신이나 새로운 선택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정치권과 대학에 속된 말로 ‘양다리를 걸치는’ 정치교수들의 행동이 그 제도에 대한 여러 가지 정당화 논리에도 불구하고 과연 학문이나 국가의 발전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지 여부에 있다.
일단 상식적으로 ‘이 일을 그만두어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태도에서는 새로운 직능에 모든 것을 던지는 헌신과 열정의 행동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양수겸장의 태도는 이론과 실천의 융합이라는 명분으로도 정당화되기 어렵다. 직업 관료나 직업 정치인들이 아무런 이론적 배경 없이 공적 업무를 수행하거나 현실 정치에 종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수준에서든 그들 모두 나름대로 이론적 토대 위에서 행동하고 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들 또는 사회 전체에게 이론적 토대나 관련 지식을 제공하는 전업행위에 바로 교수들이 수행해야 할 ‘이론이라는 실천’이 있는 것이다.
또한 국가 운영은 특정 분야의 지식이나 전문적인 이론을 넘어 총체적인 시각과 깊은 경륜을 요구한다. 따라서 설사 특정 학문 영역에서 이론적 무장이 잘 되어 있는 교수라도 국가 운영이나 현실 정치에서는 무능할 수 있다. 아니면 교수 출신이라는 사실이 의미 없을 정도로 일반 공직자나 정치인과 다를 바 없이 세속성에 쉽게 물들 수도 있는 것이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앎의 추구란 무한한 것이고, 교수직이란 바로 일생 동안 추구해도 모자랄 앎의 소업이라는 근본적인 사실이 환기되어야 한다. 그것은 일생 동안 스스로의 학문세계를 끊임없이 갈고 닦는 프로정신이 없이는 제대로 수행될 수 없는 직능일 것이다. 프로페서가 ‘아마페서’는 아닐 것이데, 다른 직능에는 프로 정신을 요구하면서 유독 교수직에게는 아마추어 정신도 괜찮다는 기이한 논리가 바로 정치교수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정치교수의 존재는 이론과 실천 융합의 상징이 아니라 학문적 아마추어리즘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조장하는 책임은 정치권에게 물을 수밖에 없지만, 현재의 한국 대학 자체는 그것에 지배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먼저 반문할 필요가 있다. 외국 대학의 학위나 외국학자 및 외국저널을 무조건 숭배하기, 우리말로도 제대로 설명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학문 내용을 영어로 강의함이 무조건 세계화라고 믿기 등, 현재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우화 같은 일들이 바로 학문적 아마추어리즘의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양승태 이화여대 교수ㆍ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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