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헤밍웨이 / media 2.0
1961년 7월 2일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엽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다. 62세였다. 그의 아버지와 남동생, 영화배우였던 손녀 마고 헤밍웨이 등 3대 6명이 자살한 집안 내력도 있다지만 <쿠바의 헤밍웨이> 에 나오는, 스페인내전 참전을 앞두고 헤밍웨이가 한 말에서 원인을 짐작해볼 수도 있겠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쓰는 거야. 전쟁이 있는 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생각해야 돼… 그러니 써야만 하는 거지. 사는 게 죽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지만, 내 장담하건대 글 쓰는 건 사는 것보다 더 힘들어.” 쿠바의>
헤밍웨이는 1차대전의 이탈리아 전선, 아프리카의 사냥터, 스페인내전의 전장을 찾아다니며 사는 듯이 살아보려 했던 남자였다. 하지만 어느곳보다 그를 생명력으로 충일하게 만든 곳은 쿠바였다. 그는 1939년부터 1960년까지 쿠바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와 <노인과 바다> 를 썼다. “낚시하기 안 좋은 날씨가 되면 당장에 글을 쓰겠네”라며, 쿠바에서 청새치 잡이에 미쳐 살다시피 하던 1939년 그는 이미 13년 후에 쓸 <노인과 바다> 의 모델이 된 늙은 어부 카를로스를 만났다. 그렇게 21년을 살던 쿠바에 혁명이 일어나 미국으로 추방당한 이듬해 그는 자살하고 만다. 노인과> 노인과> 누구를>
<쿠바의 헤밍웨이> 는 헤밍웨이의 조카인 힐러리 헤밍웨이가 2003년에 낸, 헤밍웨이의 쿠바에서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한 기록이다. 1959년 헤밍웨이가 연 새치낚시대회에서 ‘당대 가장 유명한 턱수염의 소유자였던 두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다. 그 한 사람인 카스트로는 1992년 ‘핀카 비히아’로 불리는 헤밍웨이의 쿠바 거처 보존을 위한 기념식에 참석해 회고한다. “그의 작품을 그저 소설이나 픽션으로 부를 수는 없습니다. 나는 헤밍웨이를 읽으면서 역사를 배웠습니다… 나는 한시도 그 책(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쿠바가 헤밍웨이에게 문학적 영감 그 자체였다면, 카스트로는 그에게서 역사적 영감을 얻었다는 고백이었다. 누구를> 쿠바의>
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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