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숭원 / 태학사
1912년 7월 1일 시인 백석이 태어났다. 백석의 사망 시기가 확인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만주에서 해방을 맞고 북한의 고향으로 돌아간, 재북시인이었던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1950년대말 숙청설, 1963년 사망설 등이 있었지만 1995년 1월 83세로 숨졌다는 사실이 밝혀진 건 불과 10여년 전이다. 그만큼 백석은 오랫동안 매몰됐던 시인이다. 지금은 백석을 빼고는 한국 시문학사를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지만, 우리가 그의 시를 읽을 수 있게 된 건 1980년대 후반 무렵부터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백석이 1948년 10월 해방공간에서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의 첫 부분이다. “시에 나오는 그 ‘아내’가 나야.” 1930년대 백석의 연인이었던 김자야(1916~1999)는 1999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첫마디를 이렇게 말했었다. 요정 대원각의 여주인으로 유명했던 권번기 출신의 김자야는 1989년 백석에 대한 회고록인 <내 사랑 백석> 이란 책을 냈고, 그가 낸 기금으로 1999년 백석문학상이 제정됐다. 내>
아무튼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백석 최고의 절창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위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을 만나다> 는 평론가 이숭원(53)이 해방공간까지 발표된 백석의 시 전편의 원본과 현대어 교정본, 시어 주해를 함께 싣고 각 시마다 충실한 해설을 붙인 노작이다. 백석을>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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