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축구 잔치‘유로 2008’에 대한 중국의 관심은 유난했다. 택시 기사들은 으레 손님에게 어느 나라를 응원하는지 물었고 공중파 TV들은 전 경기를 생중계했다. 조간 신문은 동 트는 시간에 끝나는 경기 결과를 특집판이라는 별지에 실어 아침에 배달할 정도로 열성이었다.‘축구의 신’이 있다면 이렇게 각별한 축구 사랑을 지닌 중국이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에 진출하지 못한 것을 분명 애석하게 여겼을 것이다.
터키ㆍ러시아의 선전에 큰 관심
이런 열기를 반영하듯 유로 2008 뉴스도 홍수를 이뤘다. 이중 압권은 유로 2008을 현 유럽 정세에 빗대어 보는 시각, 특히 전통의 강호 독일 스페인과,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유럽 변방의 러시아 터키로 짜여진 4강 구도에 관한 분석이었다.
홍콩 피닉스 TV 의 시사평론가 허량량(何亮亮)은 ‘축구로부터 미래 유럽의 문제를 본다’는 칼럼을 통해 심상치 않은 유럽의 기운을 읽었다.
그는 먼저 인구의 90%가 아시아 대륙에 살면서 유럽연합(EU)의 일원이 되려는 터키가 축구로 당당히 유럽의 골문을 가르고 이슬람교 국가인 자신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EU 주류 국가의 콧대를 통쾌하게 꺾었다고 풀이했다. 터키의 4강 진출이 유럽이 넘어야 할 종교적 관문을 상징한다고도 했다.
예선에서 영국을 탈락시킨 러시아가 구 소련 해체 후 처음으로 8강에 오른 뒤 우승후보 네덜란드마저 초토화시켰을 때 모스크바에서만 70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와 열광한 것은 슬라브 민족주의의 부활에 빗댔다. 유례없는 국가적 단결을 가져오면서 20세기 내내 비극적 시기를 보낸 러시아 민족이 결코 평범한 민족이 아니라는 점을 러시아의 4강 진출이 다시 입증했다는 것이다. 엄청난 자원과 강력한 리더십으로 재무장한 러시아를 유럽이 어떻게 포용하느냐에 유럽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도 주장했다.
유럽이 에너지원의 4분의 1을 러시아에 의존하는 것이 그에게는 이런 주장을 펼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모양이다. 러시아와 스페인의 준결승전이 진행되던 26일 러시아 석유도시 한티만스크에서 열린 러시아-유럽연합(EU) 정상회의는 그런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었다. 이 회의에서 러시아는 커진 발언권을 배경으로 EU측과 새로운 동반자 협정을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이런 해석에는 기존 질서에 도전 중인 중국의 정서가 담겨 있다. 전통 강호들을 물리치는 다크호스의 출현에 자신의 처지를 자연스럽게 투사하면서 내심 반가워 했던 것 같다. 칭다오(靑島)의 한 신문은 러시아와 터키의 결승 진출 실패를 ‘왕이 되려는 자는 먼저 쓰디 쓴 패배의 쓴 맛을 봐야 한다’는 고사로 위로했다.
국내 악재 잊게 하는 청량제로
같은 맥락에서 거스 히딩크에 대한 중국의 열광도 어느 정도 헤아려진다. 중국 언론은 러시아의 4강 진출 소식을 다룰 때 히딩크 신화 재현에 초점을 맞추면서 히딩크를 경험한 한국 이상으로 히딩크 신화를 크게 다뤘다. 히딩크에게 국가대표팀을 맡겨야 한다는 여론도 비등하다. 히딩크에 대한 열광은 국력에 비해 초라한 성적을 보이는 중국 축구계에 메시아의 도래를 염원하는 심리만으로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올 들어 티베트사태, 쓰촨(四川) 대지진 등 커다란 악재만 있었던 중국인에게 파란과 이변으로 흥미진진한 유로 2008은 잠시나마 악재들을 잊게 만든 청량제였다. 이 점만으로도 중국에게 호재였던 셈이다.
이영섭ㆍ베이징 특파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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