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임근준의 이것이 오늘의 미술!] 키스 해링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임근준의 이것이 오늘의 미술!] 키스 해링

입력
2008.06.30 04:19
0 0

1980년대의 영원한 아이콘

1958년에 태어난 젊은이들에겐 특별한 힘과 운이 허락됐던 것일까. 현대미술계를 봐도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과 그의 동년배들은 그 이전 세대와 사뭇 다른 시대를 살았다.

뉴욕의 이스트 빌리지가 ‘낭비되는 청춘들의 예술’로 빛나던 1980년대는, “과연 미술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놓고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예술가이자 사회운동가였던 해링은 펜실베이니아의 보수적인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어려서부터 앤디 워홀 등의 작품에 관심을 보이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1976년부터 1978년까지 피츠버그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한 뒤, 1980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뉴욕에서도 미술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도시 곳곳에 널린 그래피티와 한창 성장일로에 있던 게이공동체였다.

뉴욕 거주 첫 해엔 중요한 일이 많았다. 처음엔 지하철 역사의 벽면 등에 분필로 낙서를 하고 다녔고, 몇 차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나이트클럽에서 몇몇 기획전을 조직하기도 했고, 여름엔 토니 샤프라지(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에 스프레이로 낙서를 했던 문제적 인물)의 갤러리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예술가 그룹인 ‘콜랩(Colab)’이 기획한 초대형 그룹전 ‘타임스 스퀘어 쇼’에서 도심의 전광판에 그의 작품 ‘빛나는 아기’를 디스플레이한 일이었다. 이후 ‘빛나는 아기’는, (밑그림 없이) 두꺼운 선으로 과감히 그려나가는 해링의 회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이듬해 개인전을 통해 주류 미술계에 신고식을 치른 작가는, 공공미술을 표방하며 초대형 벽화를 제작하더니, 곧 카셀 도쿠멘타를 비롯한 주요 전시에 초대됐다.

영리한 작가는, 만화와 그래피티의 문법을 차용한 거친 형식으로, 문명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는 한편, 화면 전체를 아프리카풍의 패턴으로 메워 나가는 추상 작업을 병행해, 자신의 미술사적 입지를 분명히 하고자 애썼다.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자, 해링의 스타덤은 연예인 수준에 육박했고, 다작의 행진을 이어갔다. 친화력이 좋았던 덕분에, 마돈나, 그레이스 존스(모델 겸 가수), 빌 T. 존스(무용가), 티모시 리어리(LSD 명상 운동가), 오노 요코 등과 협업했다. 하지만, 이미 예술계의 기저는 에이즈의 위협으로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1988년 후천성면역결핍증 바이러스(HIV) 양성 반응 판정을 받은 해링은, 자신이 에이즈 환자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1990년 사망할 때까지, 에이즈와 에이즈공포증, 그리고 동성애자 차별에 맞서 싸우는 용감한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가 1989년 설립한 키스 해링 재단은 지금도 에이즈 환우와 어린이들을 위한 활동에 열심이다.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넷한국일보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