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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26> '화분' 참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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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26> '화분' 참패

입력
2008.06.30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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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월. 하길종 감독 그리고 하명중 제작의 첫 영화 <화분> 이 마침내 완성됐다. 단성사 시사실에서 시사회를 열었다. 당시에는 단성사, 국도극장의 뒷공간 2, 30명이 끼어 앉아 볼 수 있는 작은 창고 같은 곳을 영화 시사실로 이용했다.

내로라하는 영화기자들과 평론가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찼다. 장내에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조간 C신문에 최고의 명성을 떨치고 있는 Y평론가가 <화분> 에 대하여 ‘난해와 미완성의 극치’라며 두들기고 나왔다.

검열을 거치며 수없이 난도질 당해 스토리 운반이 다소 거칠어지기는 했지만 작품의 실험성과 예술성에선 모자라지 않다고 믿었던 하길종 감독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C신문과 쌍벽을 이루던 D신문에 ‘영화의 기본도 모르는 비평’이라며 Y평론가의 영화평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Y씨도 물러나지 않았다.

곧 이어 C신문에 반박기사를 실었다. 논쟁은 어차피 핑퐁 게임이었다. 다시 D신문에서 하 감독의 반박기사를 실었다. 한국의 최대 일간지 사이에 한 영화를 두고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한국 논쟁사에 영화 논쟁이 명함을 올린 것도 처음이었고 영화 논쟁이 신문지면을 통해 벌어진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일간지에서는 신문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생각하여 영화에 대한 기사를 가급적 다루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하길종의 경우는 예외였다. 그는 이미 각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세상은 새로운 천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기다림의 중심에 그가 있었으니 그의 영화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당시 C신문사는 정부의 막강한 배경을 등에 업고 있었으며 Y평론가 역시 한국영화계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 이론을 제기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한 세력가와 신문사에 하길종이 정면으로 도전을 한 것이었다. C신문의 J기자가 나를 통해 중재에 나서는 것으로 일은 마무리 되었다.

마침내 어렵게 개봉관을 잡았다. 한국영화 개봉관으로는 당시 최고의 관객 점유율을 자랑하던 <국도극장> . 지방배급을 위한 시사회도 가졌다. 지방 흥행사들의 반응은 냉랭하다 못해 절망적이었다. 어쩔 수없이 그 동안 무대인사를 다니며 친분을 쌓았던 지방 극장주들을 찾아 나섰다.

필름을 싣고 부산과 대구, 지리산 고개를 아슬아슬하게 넘어(당시에는 호남고속도로가 없었다) 광주로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엄청난 광고비까지 투입된 <화분> 이 1972년 4월 7일, 뚜껑을 열었다. 어느 정도 불안감은 있었지만 이 정도로 결과가 참담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첫회 상영 때 극장 1,200석을 채운 관객은 시사권 표로 입장한 50여 명과 유료 입장한 20여 명이 전부였다. 눈앞이 노래졌다. 2회 때부터 표를 사기 시작했다.

하루 유료관객 3,500명 미만이면 1주일 만에 간판을 내린다는 조건이 있었다. 첫 영화를 1주일 만에 접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을 동원해 첫 날에 사서 찢어 버린 표가 3,000장이 넘었다. 극장 뒷골목 세운상가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에서 나는 커트라인을 넘기기 위해 표를 찢어버렸다. 아니 내 가슴을 찢었다. 피카디리 극장 뒤 급전 골목에서 현찰을 구해 10일 넘게 표를 사다 보니 빚이 산더미 같이 늘게 되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형이 포기하자며 표를 찢던 내 손을 잡았다. “이번은 여기까지다.” 그리고 폭풍은 지나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다섯 편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고 있었다. 귀국하면서 계속 출연 제의가 있어왔던 KBS-TV와도 계약을 맺었다. 한국의 대표 극작가인 한운사 선생의 작품 <꿈나무> 였다. 나는 고향에 돌아온 기분으로 작품에 임했다. 결국 이 작품은 나의 대표 출연작 중 한편이 된다.

<꿈나무> 는 소재부터 신선하고 파격적이었다. 고교생이 대학입시를 앞두고 사랑에 빠져 여자 친구와 동거하고 임신까지 하게 된다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여주인공은 2,000대 1의 경쟁에서 뽑힌 신인 ‘한혜숙’이 맡게 되었다. 첫 인상이 배우 같지 않아서 좋았다.

작가 한운사 선생은 집으로 나를 자주 불렀다. 그리고 고교생인 그의 쌍둥이 아들을 인사시켰다. 한상원과 중원이었다. 선생은 주인공을 두 아들에서 찾은 것 같았다. 그는 내가 그들과 이야기하며 10대의 싱싱한 생각을 정리해주기를 원했다.

그렇게 <꿈나무> 는 자라갔다. 지금도 유리 시스터즈가 부른 드라마 주제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줄로 안다.

이쪽 가지엔 건강의 열매,

저쪽가지엔 황금의 열매

명예의 열매, 지위의 열매

행운의 열매 주렁 주러렁

사랑스런 아들 딸들아, 나의 꿈나무.

지금 보면 가사가 ‘촌스럽지만’ 당시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덕분에 유리 시스터즈도 톱 스타 반열로 올라섰다. 드라마를 좀 더 젊게 하기 위해 PD가 교체되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꿈나무는 대 성공을 거두었다. 교육부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공영 방송에서 고교생의 임신을 다루는 것은 지나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작품은 중도에서 하차하고 말았다. 그 이후 <꿈나무> 라는 단어는 사회 여러 분야에 접목되어 일반 명사처럼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현재도 스타로 활약하고 있는 송승환, 백윤식 등이 모두 꿈나무 출신이다. 나는 제작으로 짊어진 빚을 갚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정신없이 영화에 출연하였다. 그 결과 낭보가 이어졌다. 1973년 2월, <나와 나> 로 한국일보 백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게 되었다.

이어 7월에는 <몸 전체로 사랑을> 으로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연방영화사와 무려 15편의 작품 출연계약도 맺었다. 그 이유는 후에 안 이야기지만 아시아영화제의 심사위원단으로 참여했던 일본 영화관계자들이 한일 영화교류가 시작되면 나의 출연작을 모두 사겠다고 제안하였다는 것이다.

형은 당분간 대학에서 숨을 고르기로 했다. 서울예대 영화과를 창설하여 강의를 시작했다. 나는 그 동안 첫사랑인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하였고 그녀와 가족으로부터 승낙을 얻었다. 그리고 꿈이 현실이 될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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