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실종의 시대다. 정치 복원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많지만 말 뿐이다.
요즘 밤만 되면 광화문은 무법 천지가 된다. 시위대와 전경의 살벌한 대치와 폭력 속에 국민 분열은 날로 심해진다. '폭력'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 이제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나설 때다.
하지만 정치권은 갈등을 조정하려는 노력을 하기는커녕 갈등을 부추기려 한다는 비판이 무성하다. 국회가 대의정치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 18대 국회는 지난달 30일 임기가 시작된 이후 한달 째 개원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29일 오전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와 통합민주당 원혜영 원내대표가 국회에서 1시간 30분 동안 개원 협상을 했지만 여전히 접점을 찾지 못했다.
청와대와 정부, 한나라당은 쇠고기 추가 협상 이후 여론이 조금 돌아선 것에 자만했다. 정권이 국민과 야당에 진정성을 보여 주지 않고 '강경 진압'만 외치는 한 촛불은 꺼질 수 없다. 통합민주당도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다. 제1 야당으로서 정국을 이끌지 못하고 광화문 시위대에 편승하는 '저(低)차원의 정치'로 사회 불안을 키우고 있다. 대안 세력으로서의 정치력을 발휘하기 보다 작은 계산에 매몰돼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 청와대·여권 국가혼란 1차적 책임… 강경대응만으론 '악순환' 불러
총체적 혼란 수습에 정치권이 무기력하기 그지 없는 모습을 보이고 데는 무엇보다 여권의 책임이 크다. 야권의 동반 책임을 논하기 전에 청와대와 정부, 여당이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국민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데 이론이 없다. 특히 쇠고기 추가협상과 인적 쇄신에도 불구하고 국민에게 진정성과 감동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게 문제라는 지적이 크다.
우선 온 나라가 들끓는데도 18대 국회가 한 달여 간 문도 못 여는 상황에 대한 비판은 1차적으로 여당이 들어야 한다. 사회적 갈등을 녹여내는 용광로 역할을 해야 할 국회가 공백 상태인 것에 대해선 힘의 우위에 있는 한나라당이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정치학회장인 이정희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29일 “거리로 나간 야당도 문제지만 결국 정부 여당이 뭔가 풀어낼 수 있는 나름의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며 “야권을 추스를 수 있는 포용적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야당이 등원하도록 뭔가 명분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여당의 대담한 양보가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가진 사람이 양보하는 것이 한국 정치문화의 고유한 특성 중 하나임을 곱씹어 볼 때”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우리가 95% 양보했으니 나머지 5%는 야당이 양보하라”는 식의 태도로 야당을 압박할 뿐 실질적 해결책은 미루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결국에는 정치와 국회, 정당이 동시에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다.
최근의 촛불집회에 대해 강경진압으로만 대응하는 게 옳은 해법인지 여권이 고민해 봐야 한다는 충고도 나온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쉬운 정치를 하느냐, 아니면 어렵지만 국민들에게 다가서는 정치를 하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라며 “그런데 지금의 여권은 지나치게 쉬운 정치만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즉 자신들이 정한 절차에 따라서 쇠고기 협상에 대해 사과를 했고, 인적쇄신도 하고 추가협상과 후속대책을 통해 할만큼 했으니 이제 불법 폭력 시위에 대해서는 강경 대응하겠다는 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은 갈등만 격화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할 뿐 근본적 해법은 못 된다는 지적이다. 좀 더 국민 속으로 다가가고 국민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이 선행됐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영수 고려대 교수는 “불법폭력 시위를 막아야 하는 것은 물론 당연하다”면서도 “하지만 국민들에게 진정성 담긴 설득과 납득 과정 없이 무조건의 강경 대응은 악순환만 벌어지도록 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평화적 집회와 불법과격 시위를 정서적으로 분리해 내려는 정부 여당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의미다.
여권이 신뢰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좀 더 진지하게 해야 한다는 말도 많다. 김형준 교수는 “무엇보다 자기 것을 버릴 때라야 국민들이 감동한다”고 일갈했다. 여권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하고 권력을 분점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국민들이 신뢰를 다시 줄 수 있다는 뜻이다. 당장 인적쇄신을 한다고 했지만 한쪽에선 언론 유관 단체장을 비롯한 공공기관의 장 상당수를 자기 사람들로 채우는 것은 쇄신 의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라는 지적이다. “자기를 희생하고 절제하는 모습 없이 국민을 이끌 명분과 동력을 기대하지 말라”는 게 정치권 안팎의 일갈이다.
아울러 여권 내부의 계파 갈등구조를 끊고 대탕평으로 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이정희 교수는 “신뢰회복의 길은 정직함과 투명함”이라며 “여권은 지금 국민, 야당과의 소통의 방법을 다양하게, 또 제대로 찾아내 실천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정녹용 기자 ltre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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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권은 '저차원 정치'에 매몰
통합민주당이 헤매고 있다. 국회 안에선 제1야당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고, 거리에서도 시위대에 얹혀 간다는 비판을 듣는다. 거리에 방치된 사회적 갈등과 혼란을 국회로 끌어들이는 대승적 자세를 보여주기는커녕 부정적 측면을 확대재생산한다는 비난도 나온다. 이에 따라 정국을 전혀 주도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럴 의지나 전략조차 없어 보인다.
민주당이 처한 현재의 상황은 한마디로 진퇴양난이고 막다른 골목에 몰린 형국이다. 촛불집회에 전면적으로 결합할 수도 없고, 당내 이견을 조정할 지도력 부재로 전격적인 등원을 결정할 수도 없는 처지다. 전면적 장외투쟁을 선택하기엔 정치적 부담이 상당하고, 가축전염병예방법 개정 약속조차 받아내지 못한 채 등원하면 거대여당에 굴복하는 것이란 생각이 강하다. 이러니 촛불을 든 시민들에게 “이제 이렇게 합시다”라고 말할 수도 없고, 여론주도층으로부터는 국회를 내팽개친 ‘무책임한 정당’으로 비판받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당 차원의 전략과 전술이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무엇보다 지도부의 책임이 크다. 지금까지 민주당 지도부가 현재의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나라당이 청와대와의 충돌로 비쳐질 것을 우려해 극도로 조심하고 있는 가축법 개정만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당내 논의가 정리되기도 전에 등원 주장을 불쑥 꺼내 혼란을 부채질한 것 역시 지도부였다. 이에 대해 신율 명지대 교수는 “소수로 전락했다지만 민주당은 원내 81석을 가진 제1야당인데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도통 얘기가 없다”고 답답해 했다.
최근 들어 일부 의원들이 거리투쟁에 적극 결합하는 것을 두고도 비판이 적지 않다. 촛불집회가 50여일째 계속되면서 시민들과 전경들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격화하고 있는 와중에 갈등의 조정자라는 본래의 역할을 포기한 채 스스로가 갈등의 당사자가 되고 있다는 따가운 지적을 받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으로서는 경찰의 강경진압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민보호단’을 꾸렸다고 항변하겠지만, 이미 경찰의 과잉진압과 일부 시위대의 폭력시위 양상이 분명해진 상황이라면 거리에서 민주당의 역할을 찾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이처럼 민주당은 지도부의 무능과 무기력, 내부 구성원들의 중구난방식 대응으로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국회에서, 거리에서 민주당의 역할을 주문하는 목소리는 많지만, 정작 민주당은 차분하고 치밀하게 정치적 해법을 마련하기보다는 “조건반사적 대응에 몰두하는 듯한 모습”(윤경주 폴컴 대표)이다. 보기에 따라선 갈수록 심화하는 사회적 혼란과는 무관하게 전당대회를 앞둔 정치행보에만 온 신경이 가 있는 듯도 하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최근의 혼란 속에서 정치적 행보의 가닥을 잡게 된 측면도 분명히 있다”는 강변도 나온다. 비록 국회가 아니라 거리였지만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과 부대끼며 정부와 정면으로 맞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향후 등원을 결정하더라도 이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어느 정도는 덜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여야가 정치게임을 벌일 때나 타당할 법안 정치적 논리의 성격이 짙다. 지금은 세계경제가 어렵고 한국경제는 더더욱 어려운 상황이다. 하루 이틀의 근시안적 관점에서만 상황을 판단해선 안되는 국가적 위기상황인 것이다. 이제 국민과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는 충정과 결단이 민주당에 필요한 때다.
양정대 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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