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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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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입력
2008.06.30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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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지음/문학동네 발행ㆍ294쪽ㆍ1만원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소설가로 등단한 황정은(32ㆍ사진)씨의 첫 단편집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미니멀리즘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간결하고 산뜻한 문장, 카프카의 <변신> 을 연상시키는 기묘한 상상력-점점 오뚝이로 변해가는 젊은 아내의 이야기 ‘오뚝이와 지빠귀’가 특히 그렇다-이 보기 좋게 결합돼 작가의 문학적 개성을 창출한다.

수록작 ‘모자’ 속 세 남매의 아버지는 불시에 모자로 변한다. 이런 변신을 언짢아하는 이웃들 때문에 가족은 자주 이사를 다닌다. 벽에 박힌 못에 걸려 모자가 되곤 하는 아버지를 염려해 새로 이사한 집의 못을 죄다 뽑으려는 첫째를 셋째가 말린다. “그걸 다 뽑아버리니까 아버지가 아무 데서나 모자가 되잖아. 일전에 냉장고 앞에서 모자가 되는 바람에, 밟아버렸다고.”(40쪽) 딸의 가슴을 만진 예비군을 혼내주겠다며 집을 나선 아버지는 하루종일 소식이 없다. 걱정하던 남매에게 자정 넘어 파출소에서 전화가 온다. “그 댁의 부친이 여기서 모자가 되어 있습니다. 모셔가세요.”(62쪽)

모처럼 가장의 권위를 세우려던 와중에도 모자가 돼버리는 아버지를, 어떤 현실을 비추는 문학적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의 ‘숨은 뜻’을 넘겨짚으려 하지 않아도 소설은 웃음을 빼물게 하는 부조리극적 상상력과 어쩐지 쓸쓸하고 안쓰러운 정조로 가깝게 다가선다.

‘문’의 주인공은 등뒤에 남이 볼 수 없는 문이 달려있다. 그를 길러주다 세상을 뜬 할머니와 그의 눈앞에서 지하철 선로에 뛰어들어 자살한 남자가 차례로 그 문을 통해 찾아와, 그가 느끼는 인생의 고독과 결락을 위무한다. 세 인물의 나른한 동물원 방문기인 표제작에서 작가는 맥락 없어 뵈는 대화와 환상이 가미된 이미지들로 독특한 미감의 몽타주를 만들어낸다.

두 단편 ‘모기씨’ ‘곡도와 살고 있다’에선 작가가 창조한 생물들이 일상을 틈입한다. 사고로 반신불수가 된 채 가족의 지원마저 끊겨가는 앞작품 주인공의 불안한 의식은 그가 ‘모기’라고 부르는, 모기와 닮은 데가 별로 없는 젤라틴 덩어리 생명체를 제 눈 앞에 출현시킨다. 어느 지역 특산품이라는, 고양이를 닮았고 ‘타이프체 같은 음성’을 지닌 애완동물 ‘곡도’는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면 미친 듯이 소동을 일으킨다. 주인공은 이 골칫덩어리 동물을 만족시킬 옛날 이야기를 거듭 꺼내놓다가 문득 죽음에 관한 어린날 기억과 조우한다.

성별조차 모호한 인물, 기묘하고도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일상으로 채워져 있지만 황씨의 소설에서 풍겨나오는 쓸쓸함은 우리 삶의 실감과 놀랍도록 닮았다. 생모에게 버림받은 채 ‘마더’란 이름의 병든 개와 동거하는 자살 사이트 회원의 이야기인 등단작 ‘마더’와 등단한 해 발표된 ‘소년’ ‘무지개풀’은 리얼리즘 기법으로 쓰여져 황씨 소설의 원형적 주제를 좀더 명료하게 보여준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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