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 지음ㆍ이세욱 옮김/열린책들 발행(전2권)ㆍ372, 368쪽ㆍ각권 1만800원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76ㆍ사진)의 2004년 장편으로, <장미의 이름> (1980) 이래 에코가 발표한 다섯 번째 소설이다. 장미의>
에코 특유의 백과사전식 지식이 다시금 빛을 발하는 이 작품은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다른 네 전작과 달리 작가가 몸소 경험한 시대인 20세기 중반(2차대전 전후)을 다룬다. 스스로 ‘삽화소설’로 명명한 이 소설엔 작품 내용과 관계된 많은 도판-상당 부분이 에코의 소장자료-이 삽입돼 있다.
소설에 인용된 문학ㆍ만화 속 캐릭터를 합성한 콜라주 작품도 10여 건 들어있는데, 에코는 콜라주 제작에 직접 참여해 전방위적 재능을 뽐냈다. 헤아리기 힘들 만큼 다양한 문학 텍스트가 소설 속에 인용되고 있음을 물론이다. 번역가 이세욱씨는 작가가 일일이 밝히지 않은 텍스트의 출처를 찾아내 상세한 주석을 다는 수고를 들였다.
주인공은 밀라노에서 손꼽히는 고서적상 잠비티스타 보도니. 그는 환갑을 맞은 1991년 심장 질환으로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겨우 깨어난다. 후유증으로 특이한 기억상실증을 앓는다. 책ㆍ문서 등을 통해 습득한 정보에 대한 기억은 온전한데, 몸으로 체험한 기억은 남김없이 사라진 것. 화제거리마다 관련된 문학 텍스트를 줄줄 읊어대지만, 추억이 말소됐으니 가족 친지 모두 타인과 다름없다.
심리학자인 부인의 권유로 주인공은 고향 ‘솔라라’의 옛집을 찾아간다. 시골집 다락방엔 헌책방을 운영했던 할아버지의 수집품과 함께 보도니가 유년ㆍ청소년기에 남긴 기록들이 보관돼 있다. 건강에 신경쓰라는 주치의 조언도 무시한 채 그는 다락방에 틀어박혀 방대한 옛 자료들을 탐독하며 기억을 깨우려 애쓴다.
보도니의 기억 찾기는 무솔리니 파시즘과 2차대전의 광풍이 불었던 이탈리아 현대사의 복원에 다름아니다. 복원이되 공식적이고 박제화된 거시사(macrohistory)의 복원이 아닌, 이탈리아 북부 소읍 ‘니차 몬페라토’를 모델로 한 가상 마을 ‘솔라라’에 살던 필부들의 사적 경험에 기반한 미시사(microhistory)와 당시 읽혔던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문화사의 복원이다.
파시즘 체제 하의 정규 교육, 나치 괴뢰정부가 들어선 이탈리아 북부에서 벌어진 빨치산 운동 등 작중 에피소드들이 역사소설의 흥미를 제공한다. “이 책은 내 또래의 이탈리아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에코의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작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보도니의 경험이 에코의 전기적 사실과 얼마간 겹친다는 점은 소설의 자전적 성격을 짐작케 한다.
추억을 찾으려는 보도니의 노력은 첫사랑 ‘릴라’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분투이기도 하다. 그가 남긴 연애시들은 고등학교 시절 열렬히 짝사랑하던 여인의 존재를 증명하지만, 실제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깜깜한 기억 영역에 놓여있다.
책을 펴들기 전 에코의 박학다식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그 도저한 지식을 일일이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소설의 줄거리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개인적 기억을 잃은 고서적상은 고문서를 통해 기억의 얼개를 만들어가던 중 충격적 경험을 계기로 그 얼개를 채울 세부적 기억과 만나게 된다. 독자는 그저 ‘살아있는 백과사전’이 들려주는 지식과 상상력, 그것들의 연쇄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를 향해 지적 감각을 열어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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