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여러분, 체중계가 뭔지 아세요?"
"여자들이 좋아하는 거요."
"아닙니다. 여자들은 싫어해요. 체중계가 없으면 몸무게 재지 않을테니까요."
22일 오전 서울 성동구 성동외국인근로자센터 3층 교실은 한바탕 웃음 꽃이 피었다. 일요일이지만 교실 안은 한글을 배우겠다는 이방인 학생들이 내뿜는 배움의 열기로 가득찼다.
중국 몽골 방글라데시 미얀마 등에서 온 15명의 외국인 학생들은 선생님과 교재를 뚫어지게 보느라 눈을 반짝거렸고, 말 한마디를 놓칠세라 귀를 쫑긋거렸다.
그런 학생들 앞에서 한 여자 선생님이 또렷한 발음, 낭랑한 목소리로 교재에 적힌 한글 단어 하나 하나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듣기만 해도 호감이 가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문선희(41)씨다.
1990년부터 KBS에서 성우로 일하고 있는 문씨는 주말 마다 센터를 찾아 한글 선생님으로 변신한다. "원래 여행을 즐기고 외국인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는 그는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에게 도움될 일이 없을까 늘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그가 '한글 교사'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게 된 것은 7년 전 서울대 어학연구소의 의뢰를 받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교재 대본 녹음에 참여 하면서부터였다.
"성우라는 직업 때문에 한글과 가깝게 지냈지만 막상 한글을 가르쳐 보면 좋겠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는 문씨는 "갈수록 한글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한 번 가르쳐보자고 맘 먹었다"고 했다.
그는 이후 서울대 대학원의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 지도자 과정까지 이수했다. 대학원 동료의 소개로 5년 전부터 이곳 센터에서 외국인 근로자를 상대로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3년 전부터는 명지대 국제교육원에서 어학연수 온 외국 학생들에게도 한글 교사로 다가서고 있다.
성우다 보니 다른 한국어 선생님들과 차별화 되는 '문 선생' 만의 장점이 많다. 방글라데시 출신 쇼헬(40) 씨는 "문 선생님은 발음이 매우 정확해 귀에 쏙쏙 들어온다"며 "게다가 농담도 잘 하시고 이해하기 쉬운 예 들을 많이 들어 이해가 정말 잘 된다"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아이 키우랴 성우 일하랴 바쁜 와중에도 5년 동안 꾸준히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 게다가 문씨 집은 경기 김포여서 센터까지 오가는 시간만 4시간 이상 걸린다. 하지만 한국어를 배우려는 열정 하나만으로 몇 시간 걸려 찾아와 또랑또랑한 눈으로 수업을 듣는 '어른 학생'들을 마다할 수 없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이 누구냐고 묻자 방글라데시 출신 싸이풀(44)씨를 꼽았다. 그는 "야근에 특근까지 해가며 지친 몸이지만 단 한 번 결석한 적이 없는 모범생"이었다며 "그런 그가 한글 실력이 크게 늘어 지금은 센터에서 다른 외국인들에게 한글로 컴퓨터 수업을 진행하고 있을 정도"라고 귀띔했다.
학생들에게 문씨는 단순히 한글 선생님 이상의 역할을 한다. 문씨는 "학생들 상당수가 월급을 제대로 못 받거나 사기를 당하거나 하면서 마음 고생을 많이 한다"며 "그럴 때마다 찾아와 서투른 한글을 써가며 하소연할 때면 함께 눈물 흘리며 고민을 서로 나누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불법 체류자라는 딱지가 붙고 결국 강제 추방 당해야 하는 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며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이야기 들어주는 것밖에 없어 미안할 따름"이라고 아쉬워했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100만 명을 넘어 15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문씨는 외국인을 위한 한글 교실이 더 많이 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늘 갖고 있다.
그는 "외국인 근로자나 한국으로 시집 온 외국인 여성들이 많아 지는데 이들이 한국에 적응하는데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우리말을 익히는 것"이라며 "하지만 이들에게 한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곳은 턱 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몸이 열 개라도 바쁜 문 씨. 그는 "학생들의 똘망똘망 한 눈동자만 보면 기운이 샘솟는다"고 활짝 웃었다.
차예지 기자 nextw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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