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퇴직한 신문사 선배와 함께 술을 마실 때의 일이다. 사회부장을 비롯한 요직을 두루 거친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지금 사회부장이라면 좀 잘 할 것 같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은 ‘좋은 자리 다 해먹고 별 말씀 다 하시네’ 그런 식이었다. ‘후배들과 말도 잘 안 통하고 체력도 안 되실 텐데’ 하고 생각한 사람도 있다.
이념의 틀 뛰어넘는 분별을
1970년대의 사회부장에게 중요한 것은 특종이며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인권 옹호, 사회 통합에 대한 언론의 기여 따위는 개념이 약했다고 봐야 한다. 그로서는 다시 사회부장을 한다면 좀 더 익은 생각과 자세로 신문을 만들 수 있겠다는 것, 그렇게 하고 싶다는 원망을 표시한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의 말이 기자로서의 사려와 분별에 관한 언급이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언론은 사려와 분별로 사회를 이끌거나 봉사하기보다 스스로 갈등과 대립의 원산지나 집산지가 되어 있다. 1970년대에 중요한 것이 특종이었다면 지금 중요한 것은 이념과 관점이다. 모든 미디어는 이념의 도구로 전락한 것처럼 보이며, 요즘의 신문은 대자보처럼 어지럽고 시끄럽다.
그래서 가장 걱정스러운 현상은 사실에 대한 왜곡이나 무시다. 언론이나 기자가 목숨이나 종교처럼 지키며 의지해야 하는 것이 사실(fact)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이념과 관점의 틀에 갇히면 사실은 아예 없어지거나 사실이 아니게 보인다.
촛불집회가 시작됐을 때 일부 언론은 그 진정성을 무시한 채 음험한 배후를 부각시켰다. MBC PD수첩의 경우 제작진은 특정한 의도 아래 제작했다는 의심을 받아왔고 실제로 그런 점이 확인됐다. 대단히 중요한 잘못이며, 그야말로 사려와 분별이 없는 일이다. 한국의 독특한 PD저널리즘이나 그림과 폭로가 중요한 방송사 추적 프로그램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용납되기 어렵다.
그런데 제작에 참여한 번역 감수자의 이의 제기로 분명해진 그 잘못과 논란에 대해서도 어떤 매체는 아예 사실 보도를 하지 않았다. 뉴스가치에 대한 판단 잘못으로 보기 어렵다.
전직 경제부처 장관과 교수등으로 구성된 한국선진화포럼이 25일 발표한 시국선언에 미디어의 각성을 촉구하는 대목이 있다. 부정확한 근거에 의한 선동적 보도를 자제하고, 미래 지향적이고 갈등을 해소하는 보도를 지향하며, 잘못된 보도에 대한 책임성을 높이라는 주문이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지켜가야 할 언론의 자세다.
사실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것은 현장 취재기자들이다. 취재원의 말이 순전히 악의 없는 농담이었는지, 엠바고(보도 유예나 제한) 요청이 정말 합리적이고 필요한 것인지를 가장 잘 아는 것은 현장 기자들이다. 누가 구속됐을 때 다른 요인이나 흑막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현장기자의 판단이 가장 중요하다. 그 판단은 당연히 철저한 사실 확인에 바탕을 둔 것이라야 한다.
그런데, 언론계의 고유한 경쟁의식에다 이념과 관점의 틀까지 작용하다 보니 있는 사실에 눈을 감고, 없었던 문제를 만들어 내거나 과장하는 일이 많아졌다. 게다가 지금은 모두가 기자요 언론인이다. 영상매체와 인터넷의 위력이 커진 언론환경에서, 충실한 훈련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원 없이 기사를 쓰고 있다. 그에 비하면 끈질긴 취재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는 언론의 점착력과 끈기는 비할 수 없이 약해졌다.
생각이 다른 상대 인정해야
민주사회에서 이념과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하고 옳은 일이다. 그러나 생각이 다른 상대를 적대와 배제ㆍ척결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사실 보도만이 아니라 논평과 미디어비평에서도 주고 받는 극단적이고 적대적인 언어가 민주적 질서와 사회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하고 있다.
좀 더 보편타당하고 건전한 상식을 지켜가야 한다. 기자가 끝내 의지해야 할 것은 사실이며 지켜가야 할 것은 공정한 판단이며 보도행위를 통해 추구해야 할 것은 개인과 사회 발전에 대한 기여다. 기자들아, 잘 좀 하자.
임철순 주필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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