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 총재에 민유성씨 아닌 관료출신이 임명됐더라면, 모양이 참 우스꽝스러울 뻔했다. 우리금융지주회장에 이팔성씨 아닌 전직 관료가 선임됐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전임 CEO였던 산업은행 김창록씨와 우리금융지주 박병원씨는 모두 전 재정경제부 관료(넓은 의미의 ‘모피아’)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임기가 남은 상태에서 옷을 벗었다. 그런데 만약 이들 후임에 또 다시 모피아 출신을 앉혔더라면, 김창록씨나 박병원씨를 중도하차시킨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엄밀히 말해 이들은 과거 정권에서 임명됐다는 것 외엔, 쫓겨날 까닭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민유성씨나 이팔성씨 같은 민간CEO를 임명한 덕분에, 관료출신 전임 CEO들을 물러나게 한 정부의 인사정책은 최소한이나마 명분을 인정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공기업 CEO ‘민간출신 우대(관료배제)’원칙은 사실 만점짜리가 아니다. 관료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기관장 진출을 봉쇄하는 것은 역차별임에 분명하다. 이 ‘부당한 대우’로 인해 지금 50대 초ㆍ중반에 불과한 고위관료 출신 상당수가 오랜 행정경험과 역량, 폭넓은 인맥을 사장시킨 채, 그냥 ‘놀고’ 있다. 국가적 인재활용도 측면에선 오히려 마이너스인 요소도 많다.
하지만 때론 독배(毒杯)도 마셔야 할 때가 있는 법. 읍참마속(泣斬馬謖)도 감수해야 할 경우가 있다.
지난 시절을 생각해보자. 대부분 고위 관료들은 퇴직시기가 임박하면, 내려 갈 공공기관장 자리를 마치 ‘쇼핑’하듯 고르곤 했다. A기관장은 차관급 자리, B기관장은 국장급 자리 식으로 서열도 매겨져 있었다. 수시로 ‘낙하산’을 타면서 3,4곳 기관장을 거치는 사람도 있었고, ‘운 나쁘게도’ 1회 낙하산으로 끝나면 친정 부처에 “누구는 두세 번 씩 봐주면서 난 왜 한 번밖에 안 챙겨주나”고 항의하는 예도 비일비재했다. 공공기관은 국가나 국민 소유가 아니라, 관료 소유의 ‘실버 타운’이었던 것이다.
낙하산의 끈은 질기고도 강했다. 공공개혁의 깃발을 들었던 김대중 정부도, 기득권 거부정서가 그토록 강했던 노무현 정부도 이 끈은 끊질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가 꼭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민간우대(관료배제)’도 언젠가는 사라져야 할 원칙이다. 하지만 너무도 단단히 박힌 낙하산의 뿌리를 뽑기 위해 반드시 한번은 거쳐야 할 과정이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적어도 이번 공공기관장 인사 만큼은, 좀 무리다 싶을 정도로까지 민간우선 원칙을 밀고가야 한다. 최소한 직전 CEO가 관료 출신이었던 기관만이라도 민간인사를 앉혀야 할 것이다.
관료 출신들로선 역차별이 억울할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마지막 낙하산마저 놓친 관운의 끝, 수 십년 관치의 업보로 생각해야 한다.
한 3년 후, 다음 기관장 인사 때가 되면 민간우대(관료배제)가 능사가 아니었음을 느낄 것이다. 무차별적인 관료낙하산 만큼이나 맹목적인 민간우대도 정답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어 관료든 민간이든 태생을 따지지 말고 오로지 능력만으로 CEO를 뽑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생기고 이는 제도로 자리잡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공공기관장 인사가 정상화되는 순간이다.
이성철 경제부 차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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