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했을 것이다. 쓰러진 전우들을 한 데 눕히고 급한 대로 판초의(우의)를 덮어 가매장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서둘러 다시 퇴각했다. “반드시 돌아와 제대로 거둬주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을 것이다. 1951년 4월 하순의 일이었다.
당시 중공군의 ‘4월 공세’에 밀려 국군 6사단은 강원 화천 사창리에서부터 남으로 퇴각 중이었다. 경기 가평군 하면 하판리 보리울의 야산 능선의 해발 500m 지대에 다다른 6사단은 ‘지연전’을 위한 진지를 구축했다.
조금만 더 남으로 가면 양평이다. 다른 부대들의 퇴각을 돕기 위해서라도 이 자리에서 중공군 4개 사단 병력의 발을 잠시라도 묶어둬야 했다.
이 일대에서 1,600여명의 국군이 실종ㆍ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26일 오후 그 보리울의 야산 능선.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및 육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장병들이 지난달부터 곳곳에서 6ㆍ25 전사자 유해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는 현장이 공개됐다.
한 소나무 아래 다섯 구의 유해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이들을 덮고 있는 판초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M1 총탄과 탄피, 총탄 자국이 선명한 수통, 고무 밑창만 외롭게 남은 전투화….
이들을 포함해 가까운 일대 6군데에서 22구의 유해가 발견됐다. 6곳 모두 밑에서 올라오는 중공군에 맞서기 수월하게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감식단과 육군 수기사 장병들은 지난달부터 이 일대에서 모두 360군데 이상의 구덩이를 파고 유해 발굴을 하고 있다.
박신한(육군 대령) 감식단장은 “다른 발굴 사례와 비교하면 작업한 구덩이의 수에 비해 유해가 발굴되는 정도가 매우 높아 전투가 치열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했다.
60년 가까이 지난 지금 6ㆍ25 전사자 유해 발굴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이 지역만 해도 중공군 공세에 따른 퇴각 과정에서 큰 전투가 있었지만 구체적인 전사(戰史)가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이용석(육군 중령) 감식단 발굴과장은 “오래 전부터 여러 차례 다녀갔지만 지역을 특정할 수 없어 본격적인 발굴에 나서지 못했다”며 “5월부터 다시 집중 탐사 작업을 벌이던 중 지역 주민의 생생한 증언이 나오면서 발굴작업이 급물살을 탔다”고 말했다.
조심스럽고 엄숙한 작업 끝에 유해가 발굴되면 장병들은 유해를 관에 안치하고, 태극기로 관을 두른다. 그리고 현장에서 소주 한 잔을 올리고 경례를 하며 예를 갖춘다. 감식단은 이번에 발굴된 22구의 유해에 대해 유전자 시료를 채취, 지금까지 등록된 유가족들과 비교해 신원 확인에 나설 예정이다.
진성훈 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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