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모 대형 자산운용사의 적립식 중국펀드에 가입한 P(33ㆍ여)씨는 요즘 울화가 치밀어 화병이 생길 지경이다. 단지 수백만원의 손실을 봤기 때문만은 아니다. 온갖 감언이설로 투자를 유치해놓고는, 수익률이 형편없자 ‘나 몰라라’ 하는 운용사 행태에 분노가 치미는 탓이다.
P씨는 “국내 1위의 자산운용사가 금방 큰 돈을 벌 것처럼 적극적으로 권해서 가입했는데, 이제 와서 10년만 더 기다리라고 하니 사기를 당한 느낌”이라며 “3~4년 후 환매해서 집 사는 데 보태려고 했는데 황당하기 그지 없다”고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대형 자산운용사에 대한 투자자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P씨처럼 업체의 유명세만 믿고 직원이 권하는 이른바 ‘유망 펀드’에 가입했다가 손실을 입은 투자자가 늘어나고 있는 게 1차 원인이다. 물론 투자를 하다 보면 손실은 언제나 있을 수 있다. 문제는 대형 운용사에 대한 투자자들의 ‘불만’이 ‘불신’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내 3대 자산운용사인 미래에셋자산운용, 한국투신운용, 삼성투신운용은 최근 1~2년 새 특정 해외펀드에 투자자들을 집중 유치했다. 미래에셋운용은 작년 하반기부터 과거의 높은 수익률을 강조하며 중국펀드 마케팅에 ‘올인’ 했다. 그 결과 작년 9월 2조원에 약간 못 미치던 중국펀드 수탁고는 3개월 새 약 3조8,000억원으로 배 가까이 늘어났다. 한국투신운용 역시 작년 초 베트남 펀드를 집중 출시했고, 같은 시기 삼성투신운용은 6개 일본펀드를 대거 출시하며 1조원 이상을 쓸어 담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들 3개사가 권한 해외펀드에 대규모 자금이 몰리자마자 수익률은 곤두박질쳤다. 한국펀드평가에 따르면 중국펀드 수익률은 자금이 몰리기 시작하던 작년 10월 말 대비 3분의 1토막(약 -34%)이 났다. 베트남 펀드 역시 베트남의 경제 위기가 고조되면서 최근 1년 수익률이 -25% 이상 떨어졌다. 최근 반등 기미를 보이는 일본펀드 역시 1년 수익률은 아직 마이너스대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도 펀드를 생산한 운용사나 판매 증권사는 여전히 ‘장밋빛 전망’만 내놓아 투자자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처음엔 “괜찮겠지”하며 애써 안도하던 투자자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치고 환매 움직임이 가시화하자, 결국 계열 증권사 대표들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외부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박현주 미래에셋증권 회장은 최근 외부 강의와 중국 방문 등을 통해 중국시장의 성장성을 홍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도 이달 초 베트남을 방문해 기자간담회를 갖는 등 바쁜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조금 더 기다려 보라”는 조언 외에 뾰족한 해결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원인은 뭘까. 우선 현지 법인이 제대로 자리잡기 전에 섣불리 상품 판매에 나선 점이 지적된다. 전문가들은 해당 국가에 진출하려면 최소 2년 정도의 사전 준비는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에 대해 미래에셋자산운용은 2003년 12월 홍콩법인을 세우고 2005년 10월 중국펀드를 내놓은 만큼, 별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홍콩법인 리서치센터가 본격 가동된 시점은 로버트 제임스 호럭 센터장 등 20여명의 글로벌 인재를 고용한 2006년 초이다. 이를 감안하면 준비기간이 그리 충분했다고는 볼 수 없다. 한국투신운용의 모 회사인 한국금융지주의 경우 2005년 6월부터 준비를 시작해 2006년 3월 베트남 펀드를 만들었기 때문에 준비 기간은 채 1년이 안 된다.
무엇보다 변동성이 큰 신흥시장 펀드에 투자자를 집중 유치한 것 자체가 ‘투자의 정도(正道)’를 벗어난 무책임한 행위라는 지적이 많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해외시장을 국내 증시에 비유하자면 선진국은 코스피, 중국 베트남 등 신흥국은 코스닥이라고 할 수 있다”며 “자산의 70%는 코스피에 투자하고 10% 정도를 코스닥 종목에 배팅하는 것이 정상적인데, 현재 국내 해외펀드들은 코스닥 시장에만 90% 이상을 투자하는 비정상적 투자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 관계자는 또 “특정 시장에 자금을 ‘몰빵’한 회사가 해당 시장에 대해 객관적인 분석을 내놓을 리 만무하다”고도 했다. 운용사들이 팔기에만 급급해 제대로 된 분석도 없이 유명펀드를 만들기 위한 광고홍보에만 투자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정영완 삼성증권 투자전략센터장은 “신흥국가 시장의 주가 급락에 따른 이번 혼란을 계기로 합리적인 자산배분 전략에 근거한 올바른 펀드시장 질서가 확립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준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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