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남부 오키나와(沖縄)현 도카시키(渡嘉敷村)촌의 전직 중학 교사 요시카와 요시카쓰(吉川嘉勝ㆍ69)씨는 1945년 오키나와 전쟁의 경험을 일본 전국을 돌며 증언하고 있다. 문부과학성이 패전 직전 오키나와 집단자결이 ‘군의 강제’였다는 고교교과서 내용을 삭제토록 검정의견을 낸 지난해 3월 이후부터다.
미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정도로 전세가 기울자 도카시키 촌민들은 산속에 모였다. 당시 6세이던 요시카와씨는 10살 위의 형을 비롯해 친척들과 손을 잡고 둥그렇게 원을 만들었다. 촌장이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자 여기저기서 수류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요시카와의 집안 어른들이 준비했던 수류탄 4발은 다행히 모두 불발이었다.
23일은 오키나와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의 날’이었다. 45년 3월 하순부터 6월말까지 미군과 일본군이 싸우는 과정에서 희생된 오키나와 주민은 올해 128명이 추가돼 모두 24만734명이다. 당시 오키나와 주민 4명중 1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종전 63년인 지금도 오키나와 주민은 전쟁의 아픔을 잊지 못하고 있다고 아사히(朝日)신문은 전했다. 주민들은 군이 강제로 집단자결을 유도한 사실을 애써 회피하려는 일본 정부에 분노하고 있다. 주일 미군기지 문제는 떨치지 못할 숙명이라도 된 듯하다.
도카시키와 함께 미군 상륙작전의 첫 타깃이었던 자마미지마(座間味島)의 전 농업조합 영농지도원 미야자토 데쓰오(宮里哲夫ㆍ73)씨는 44년 9월까지만 해도 마을이 전쟁에 휩싸일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군이 상륙하고 마을 전체가 사실상 일본군 지원 및 배후기지로 바뀐 뒤 자신들은 군과 생사를 같이 하는 것이라고 믿게 됐다. 그는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군이 집단자결에 관여했다는 걸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일본군이 들어가지 않은 섬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가”라고 반문했다.
나카이마 히로카즈(仲井眞弘多) 오키나와현 지사는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총리도 참석한 이날 전몰자 추도식에서 평화선언을 통해 “전쟁의 기억을 올바르게 전해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점을 확인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오키나와의 출발점이다”고 밝혔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도쿄=김범수 특파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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