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본능과 양심(혹은 정치적 신념). 간혹 이 두 가지가 부딪힐 때가 있다. 전쟁이나 혁명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는 그 빈도가 잦아진다. 대부분의 사람은 앞의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치욕스러워 한다.
정치적 신념 앞에 생존이란 누추한 것이다, 라고 우리는 교육 받았다. 순교자에 대한 칭송과 배신자를 향한 손가락질로 역사는 채워졌다. 사람들은 그러나, 그 가르침의 비현실성에 늘 절망한다.
<카운터페이터> (감독 스테판 루조비츠키)는 이 딜레마에 조금 다른 시선을 던진다. 찬찬히 영화의 흐름을 좇다 보면 학습된 관념이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카운터페이터>
'살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은 과연 정치적 신념이 뱉어 놓은 오물만도 못한 본능인가. 어느쪽이 옳다는 단정은 이 영화에 없다. 죽음의 공포를 눈 앞에 둔 인간의 표정을 통해, 다만 그 관념을 싸고 있는 껍질의 연약함을 보여줄 뿐이다.
영화의 배경은 나치 말기의 유태인 수용소. 여기에 비밀 조직이 꾸려진다. 은행원과 인쇄공, 제지공, 위조지폐범이 한 막사에 수용된다. 가스실의 공포가 울타리를 이룬 공간에서, 이들은 영국 파운드와 미국 달러를 만드는 사역에 동원된다.
그것을 거부해도 죽음,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도 죽음이다. 천재 위폐범 소로비치(카알 마르코빅스)의 재주로 이들은 목숨을 이어간다. 하지만 나치를 돕는 일은 동족을 배반하는 일이라 믿는 인쇄공 브루거(오거스트 디엘)가 공공연히 태업을 시도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의 갈등은 나치와 유대인 수용자들 사이보다 소로비치와 브루거 사이에서 출렁인다. 브루거는 "양심을 거스르면서 왜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 소로비치는 "난 목숨 연명해 온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소로비치의 생존은 이기적이지 않다. 그는 함께 갇힌 동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위험에 처한 브루거도 감싸준다. 소로비치는 눈 앞의 동료를, 브루거는 전 세계의 평화를 걱정한다. 그러나 좁은 수용소 안에서 두 휴머니즘은 모순된다.
전쟁은 끝이 난다. 소로비치도 브루거도 살아 남았다. 하지만 수용소 밖에서 영웅은 브루거다. 크고 작은 휴머니즘이 모순되지 않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소로비치는 다시 위폐범일 뿐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 후회는 없다. 소로비치는 그가 만든 위조지폐 다발을 카지노에서 탕진해 버린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우아하게 춤을 춘다.
그가 도박장에 내다 버린 것은 참혹한 전쟁의 기억일까, 아니면 무기력한 양심의 부스러기일까. 올해 아카데미 영화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수상작. 7월 3일 개봉. 15세 관람가.
유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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