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길종, 하명중형제의 HAH-BROTHERS!
나는 영화를 처음으로 만든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 , 미국의 <워너 형제-wb> , 홍콩의 <쇼 형제-sb> 를 생각하며 한국의 <하 형제-hb> 를 만들려는 꿈을 하나씩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해외와 국내에서 번 돈을 모두 털어 넣기로 결심했다. 하> 쇼> 워너> 뤼미에르>
1970년, 영화 제작은 허가된 14개 제작사만 가능했다. 우선 D영화사 명의를 거액의 사례를 주고 빌렸다. 하길종 감독은 미국 유학시절부터 교분을 쌓은 유현목 감독의 추천으로 스태프를 구성했다. 해외 유학파에 대한 보이지 않는 견제가 선택폭을 좁게 했지만 결과는 최상이었다.
각색-홍파, 촬영-유영길, 음악-신중현, 편집-이경자, 조감독-김호선, 캐스팅은 당시 톱 배우인 남궁원, 최지희, 그리고 여운계, 신인 박지혜, 그리고 나.
하길종 감독의 첫작품인 영화 <화분> 의 줄거리는 주 무대 ‘푸른집’의 주인인 현마(남궁원)가 아내(최지희)와 처제 미란(박지혜)을 사랑하면서 비서 단주(하명중)도 사랑하고, 가정부(여운계)는 단주를 사랑하고... 화분>
한 집의 부패와 몰락에 대한 이야기다. ‘푸른 집’은 글자 그대로 ‘청와대’를 비유하였는데 <화분-꽃가루> 는 국내 첫 번째 ‘게이영화’이기도 했다. 우리는 다행히 작품에 맞는 집을 찾았다. 국내 최초의 민간항공사 KNA의 사장이었던 S씨의 시흥 호화저택이 비어있다는 복덕방의 정보를 입수하고 그 집을 빌리기로 하였다. 화분-꽃가루>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푸른 집’의 대소도구를 집의 물건과 지인들의 물건을 빌려 채웠다. 심지어 우리 집 가정부까지 스태프들과 함께 거주하며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하길종 감독의 ‘카메라 아이’는 매우 특별했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500mm Zoom 렌즈를 Zoom in, out 용으로만 이용하고 있었는데 그는 망원으로 사용하며 세밀한 렌즈 이동의 효과를 선보였다. 국내영화에서는 전혀 시도한 적이 없는 카메라워크였다. 수없이 NG가 났다.
작업방식도 달랐다. 국내에선 한 방향으로 조명을 하고 촬영한 뒤, 반대 방향으로 촬영하여 시간과 돈을 아꼈는데 형은 할리우드 방식으로 순서대로 촬영하고 똑같은 연기를 반대 방향에서 다시 촬영했다. 당연히 시간과 필름이 2배 이상 소요되었고 배우와 스태프들도 힘겨워 할 수밖에 없었다.
40일간의 ‘푸른 집’ 촬영 일정이 지연되어 어느덧 겨울이 가고 1971년 봄이 왔다. 정원에 새싹이 돋고 꽃이 만발해지자 우리는 푸른 잎과 꽃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카메라 안으로 밀려드는 봄을 막을 수 없었다. 촬영의 95%를 마치고 있었다. 형은 고민에 빠졌다. 나는 남은 5%를 위해 겨울이 다시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하고 촬영 보따리를 쌌다.
우리는 겨울이 올 동안 편집을 마치고 음악을 준비하였다. 영화음악이 처음이었던 신중현씨의 음악이 편집된 필름에 얹혀졌다. 형은 매우 만족해 했다. 음악과 영화의 두 전위작가의 만남이었다. 마침내 겨울이 다시 왔다. 우리는 신바람이 나서 다시 모였다. 그러나 그해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엄청난 추위와 고통을 준비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주인공 박지혜, 그녀가 GI로 근무하는 미국인과 결혼한 것이다. 결혼이야 축하할 일이다. 그런데 결혼한 미국인이 재계약을 요구하며 한국 최고 김지미의 출연료와 동일한 금액을 제시해왔다.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길종형은 미국인과 수차에 걸쳐 의논을 하였으나 매번 거절을 당했다. 나는 미국인이 한국인에 대한 우월주의로 못된 소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판단했다.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형에게 배우 교체를 요구하였다. 형은 95%의 촬영 분을 버리고 재촬영한다면 손실이 너무나 크다고 다음날 미국인을 다시 만나서 설득해 보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 날 현상소로 달려가 그 동안 촬영한 필름을 모두 소각하여 버렸다. 필름은 잘 타지 않았다. 나는 휘발유를 붓고 불을 댕겼다. 형이 미국인에게 머리 숙이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집문서를 들고 은행을 찾았다. 그리고 제작비를 다시 마련하였다. 새 주인공으로 ‘윤소라’를 캐스팅하였다. 그 해 겨울 다시 촬영을 시작하였다. 한 번 찍어 본 촬영분이라 속도가 붙었다.
마지막 촬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만리포 겨울 백사장의 자동차 추격 장면이었다. 형은 하얀색 세단을 다음날 새벽까지 태안 앞 바다, 만리포 백사장에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하루 종일 서울을 뒤졌다. 심지어 외교관 차량들까지 찾아보았다. 눈을 뒤집고 보아도 병원 앰뷸런스 외에는 한국에 하얀색 세단은 한 대도 없었다. ‘베이지색은 안 되느냐’고 물었다. “안 돼!”
앞이 캄캄했다. 머리를 쥐어짰다. 궁하면 통한다고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가정부에게 급히 풀을 쑤라고 하고 지물포로 달려갔다. 누런 창호지를 어깨에 메고 이번엔 페인트 가게?달렸다.
“하얀 수성페인트!! ”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잘 붙은 연탄불을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가정부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 세단에 그녀와 풀칠을 시작했다. 풀칠을 끝내고 그 위에 창호지를 바른 뒤 연탄불로 지지기 시작했다. 검은색 자동차가 누런색으로 변해 갔다. 그 위에 다시 하얀색의 페인트를 발랐다.
순간 하얀색 세단의 자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통금해제 사이렌이 불고 있었다. 나는 차고에서 차를 꺼냈다. 영락없는 하얀 세단이다. 나는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달렸다. 말 그대로 쏜 살 같이 만리포로, 만리포로 달렸다. 멀리 수평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명이 스카이라인을 만들고 있었다.
백사장 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경적을 울리며 그들 앞으로 차를 몰았다. 달려나온 형의 눈이 커질대로 커졌다.
“어떻게 된 거야? 진짜 하얀색 세단이네.”
“빨리 찍어. 시간 없어.”
형의 눈이 먹이를 발견한 독수리 눈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귀신 같이 카메라를 돌렸다. 정말 귀신 같이. 차가 만리포 백사장을 달렸다. 파도가 밀려왔다. 하얀색 세단은 거침없이 파도를 가르고 백사장을 달렸다. 만리포 장면은 그의 어떤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신들린 장면이었다. 한참 촬영을 하다가 형의 눈이 카메라에서 빠져나왔다.
“야, 왜 자동차 아래가 까매?”
나는 형에게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만 찍어. 흰 창호지가 파도에 젖어서 어쩔 수가 없어. ”
나는 하얀 창호지가 너덜거리는 차로 다가가며 형에게 하얀 세단을 만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형은 파도에 쓸려나가는 하얀 창호지를 보고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형이 나를 잡고 웃던 모습이 생각난다.... 만리포 바다를 껄껄대며 울리던 그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내 귓전에서 울린다.... 불가능은 없다. 우리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 그 때, 형의 웃음소리는 아직도 내게 그런 함의(含意)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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