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오른 매실을 한 광주리 담아 거실 한쪽에 두었다. 집안에 복숭아 향인 듯, 살구 향인 듯 달고 새콤한 향기가 잔잔히 퍼진다. 일과를 마치고 귀가한 남편은 현관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묻는다. "복숭아 샀어?" "아니, 매실이야. 술 담그려고." "와, 매실 익는 냄새가 이렇게 예쁘구나." 두 사람의 기분 좋은 저녁이 시작된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메밀장에 톡 찍어 먹는 냉 메밀국수와 따뜻한 달걀말이, 그리고 매실주 한 잔. 복숭아꽃이 떠다녀야만 무릉도원이더냐. 작은 부엌에 매실 익는 냄새 진동하고, 부부가 앉아서 작년에 담근 매실주에 구수한 메밀국수 나누며 먹다보니 우울한 장마도 싹 잊는다.
■ 매실
결혼 4년차인 나에게 여름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는 다름아닌 시어머니의 매실주다. 매년 6월을 넘기지 않고 반드시 매실주를 담그신다. 매실주는 큰 병, 매실청은 작은 병에 가득 담고, 꼭 틀어막아 챙겨주신다. 챙겨주신 매실이 익는 동안에는 작년에 담가 주신 매실주와 매실청으로 버틴다.
소심한 성격 때문에 식후에 자주 체하는 내게 매실청, 즉 매실 엑기스는 보약. 한 스푼 물에 타서 마시거나 그냥 시럽 그대로 꿀꺽 삼키면 체기가 가라앉는다 (달콤한 향기 때문에 기분이 우선 좋아진다).
매실에는 사과산, 구연산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서 피로 회복, 식욕 증진을 돕는 비타민 역할을 한다. 그래서 매실주를 마시면 지친 몸에 활력을 주면서 덩달아 소화 기능까지 향상된다. 술을 담글 때 감초를 조금 넣으면 독성을 제거하고, 술맛을 깊게 만드는 효과가 있으니 참고하자.
매화나무는 아직 추운 이른 봄, 가장 먼저 꽃을 틔워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 대견한 모습에 매료된 많은 문인들은 매화를 칭송하는 시를 썼고, 화가들은 그림으로 모습을 남겨주었다. 고려말의 문신 원정공 하즙 선생이 좋은 예. 선생이 심고 아끼던 매화나무는 아직도 남아 '원정매'로 불리고 있다.
집 앞에 일찍 심은 한 그루 매화
한겨울 꽃망울 나를 위해 열었네
밝은 창에 글 읽으며 향 피우고 앉았으니
■ 한 점 티끌도 오는 것이 없어라
봉우리를 틔워 막 꽃이 피기 시작한 매화를 똑똑 따서 말리면, 다음 봄까지 매화의 향기를 즐길 수 있다. 쪄서 말리거나, 아님 한지를 그늘에 깔고 생화를 말린다. 정성으로 말린 매화 한 송이를 찻잔에 넣어 물을 붓고, 잠깐 기다린다. 찻잔을 얼굴 가까이 대면 꽃내음이 솔솔 코에 닿는다. 우울증이 싹 달아나고, 답답했던 가슴이 풀리기 시작한다.
매화 보고, 차를 마시고, 술을 담그고, 장아찌를 만들고, 잼이나 식초를 매실로 만든다. 매실청은 설탕을 대신하여 요리에 이용하는데, 고기를 재울 때나 간장 양념의 떡볶음 등에 유용하다. 매실을 가까이 하여 살다보면, 여자는 예뻐지고 기분도 밝아진다. 그런 안사람을 보는 바깥사람은 매실주 한 잔이 절로 생각나겠다.
■ 메밀국수
여름이 왔음을 알리는 또 하나의 메뉴는 바로 메밀국수. 일본식 소바도 좋고 우리식 메밀국수도 좋다. 까끌까끌, 구수한 면을 천천히 씹다보면, 속이 청량해진다. 메밀 함량이 높은 면을 찾아내는 것이 관건. 그 다음은 일본식으로 가다랑어 육수에 즐길 것인가, 우리 식으로 즐길 것인가를 정하면 된다.
일본식으로 톡 찍어 먹는 소바를 즐기고자 한다면, 무와 다시마로 만든 육수에 가다랑어 포(가쓰오부시)를 넣어 우려내고 체에 거르면 된다. 여기에 유자 간장, 소금, 설탕, 식초 약간으로 간을 맞추면 되는데, 번거로워하는 이들을 위해 시중에는 '소바 장국' 등의 이름으로 제품이 나와 있다.
차게 준비한 장국에 소화를 돕는 무, 김과 다진 실파를 넣어 차갑게 헹궈 낸 면을 찍어 먹으면 더위가 싹 가신다. 저녁 메뉴로는 어딘가 부실하다고 느낀다면, 따끈한 계란말이나 간단히 부쳐낸 부추전 정도를 곁들일 수 있다. 아님 고구마나 깻잎, 새우 등을 튀겨 정통 일본식으로 곁들여볼 수도 있다.
17세기의 요리 문헌 <음식지미방> 에도 메밀면이 등장할 정도로 우리는 꽤 오래 메밀면을 먹어 왔다. 야채만 그득한 일명 '쟁반국수'가 아닌, 진정한 막국수를 먹어본 이들은 메밀면의 참 맛을 알고 있다. 그 담담하고 점잖은 맛. 몸속에 때처럼 껴있는 기름기를 막 씻어내 줄 것만 같은 맛이다. 음식지미방>
양념에 절은 혀와 목구멍이 싹 청소되는 날이 바로 메밀 막국수를 먹는 날이다. 최근 서울에 분점을 낸 샘밭 막국수(02-585-1702, 033-242-1702)는 춘천 토박이로 그 역사가 40년에 이른다. 메밀 마니아인 나는 춘천에 갈 때마다 그곳에 늘 들렀더랬다. 뚝뚝 끊기는 순도 높은 면과 곁들이는 육수(주전자에 담겨 나온다)의 조화가 우아하다.
저녁 메뉴로 메밀국수를 준비한 날은 '다이어트 데이'(diet day)라는 암시. 아침에 나가는 남편이 좀 살쪄 보일 때, 내 옷 입은 모습이 좀 타이트하게 느껴질 때 준비하는 음식이다. 허기를 채우고, 몸매를 챙겨줄 여름 저녁의 가벼?메뉴로 적당한 맛이다.
박재은ㆍ음식에세이 <밥 시> 저자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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