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이 돌아왔다. 오일에서 이젠 축구까지.’ 러시아가 오일 머니를 무기로 스포츠에서도 화려한 부활의 축포를 쏘아 올렸다.
2008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08)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러시아 축구 대표팀이 21일(현지시간) 예상을 깨고 네덜란드를 누르고 4강에 진출하자 전 세계가 놀라고 있다.
변방의 팀에 기적 같은 승리를 안겨주는 ‘히딩크 매직’에 대한 경탄만은 아니다. 한때 스포츠 강국이었지만 91년 구 소련 해체 이후 국제 스포츠계에서 사라지다시피 한 러시아의 놀랍도록 무서운 성장에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오일 머니를 배경으로 미국에 맞서는 국제 파워로 다시 등장한 러시아가 이젠 스포츠 강국의 옛 영화를 되살리고 있다.
러시아 스포츠의 잇단 개가
러시아의 유로 2008 4강 진출은 최근 러시아 스포츠가 일궈낸 잇단 성공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다. 지난달 14일 무명에 가까웠던 러시아 축구클럽 제니트가 유럽축구연맹(UEFA)컵에서 깜짝 우승한 것은 그 서막이었다.
나흘 뒤 러시아 아이스하키 대표팀이 세계 아이스하키 챔피언십에서 캐나다를 누르고 15년 만에 우승했다. 급기야 예선 통과조차 의심스러웠던 축구 대표팀이 유로 2008에서 구 소련 해체 이후 처음으로 8강 진출에 성공한 데 이어 우승후보 네덜란드까지 제쳤다.
러시아 국민들의 기쁨도 두 배로 커졌다. 이날 밤 수 천명의 시민들이 크렘린궁 앞 트베르스카야 거리 등으로 쏟아져 나와 “러시아”와 “히딩크”를 연호하며 밤새 거리를 누볐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미국 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러시아의 잇단 스포츠 승전보는 러시아의 새로운 시대를 반영하는 상징이다”고 전했다.
오일 머니의 물량 공세
이런 성공의 이면에는 러시아 당국과 기업의 엄청난 스포츠 투자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을 맡기도 했던 딕 아드보카트 감독을 영입, 일약 명문클럽으로 등장한 제니트의 소유주는 세계 최대 천연가스회사인 가즈프롬이다.
에너지 가격 상승 덕에 지난달 제너럴일렉트릭(GE)를 제치고 시가총액 세계 3위로 발돋움한 이 회사는 2005년 제니트를 인수해 선수영입과 경기장 신축까지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었다. 3년 전 2,5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제니트의 1년 예산은 이젠 1억 2,000만 달러에 달한다.
축구 국가 대표팀의 돈줄은 2003년 영국 명문 축구클럽 첼시를 인수한 러시아 석유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다. 새 훈련장, 새 경기장 건설자금뿐 아니라 히딩크 감독의 연봉까지도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러시아 석유회사 루크오일이 모스크바 축구클럽 스파르타크를 운영하는 등 다른 축구 클럽도 거대 기업들이 맡아 매년 수천만달러씩을 투자하고 있다. 스포츠마케팅사 스포르티마의 알렉세이 크라스노프 대표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결과들은 단연 많은 기업들의 투자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로 4강 진출이란 ‘히딩크 매직’ 뒤엔 러시아의 거대한 오일 머니가 뒷받침돼 있다는 얘기다.
‘영광의 재현’ 푸틴의 스포츠 정책
스포츠 투자의 배후 조정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이다. 삼보, 유도, 수영, 헬스를 즐기는 스포츠광으로 유명한 푸틴은 스포츠를 통해 국내적으로는 애국적 단결을, 국제 무대에선 러시아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유치에 국영 기업을 총동원해 물량 공세를 퍼부었던 것도 대표적 사례다. 보리스 그리즐로프 러시아 하원 의장이 축구 대표팀 응원가를 직접 짓는 등 정치인들의 관심도 대단하다.
스포츠는 푸틴이 내세운 ‘강한 러시아의 부활’을 실현하는 무대인 셈이다. 캐나다 일간 토론토스타는 “러시아 기업의 스포츠 투자는 단지 애국적 충동 만이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석유재벌 아브라모비치가 러시아 축구에 거금을 투자하는 것도 푸틴과의 관계를 다지기 위한 포석이다.
러시아의 스포츠 부활은 서구에 권위주의 체제의 거친 러시아 이미지를 개선하는 효과도 적지 않다. 히딩크 매직으로 벌써부터 러시아 축구팀과 선수들에 대한 팬들의 관심이 뜨겁다. 비즈니스 위크도 “러시아 기업에 부정적인 서구 소비자들에게 스포츠의 성과는 러시아를 홍보하는 매우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송용창 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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