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69ㆍ사진)씨가 올해로 고희와 등단 40주년을 맞았다. 뜻 깊은 해에 한씨는 장편소설 <다산> 과 네 번째 시집 <달 긷는 집> 을 함께 출간했다. 달> 다산>
<다산> 은 <초의> (2003) <흑산도 하늘 길> (2005) <추사> (2007)로 이어져온 작가의 조선 후기 역사소설 시리즈를 일단락짓는 작품이다. <흑산도 하늘 길> 주인공이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고, 초의는 다산의 제자였으며, 추사는 초의의 평생지기였음을 기억한다면 네 소설의 친연성을 어렵잖게 알아챌 수 있다. 흑산도> 추사> 흑산도> 초의> 다산>
200여 권의 문헌과 고증자료를 참고할 만큼 충실한 역사적 고증 하에 쓰여진, 700쪽에 달하는 이 장편은 해배돼 고향에 돌아온 다산의 회혼식에서 시작해 같은 장면으로 끝을 맺는 수미상관 구조를 이룬다. 회혼식 전날 잠자리에서 다산은 일찍 세상을 뜬 친구 이벽과 함께 서양인과 중국인으로 각각 받은 약을 섞어 마시는 꿈을 꾼다.
두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하는 그에게 이벽이 말한다. “이 어르신은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자이시고, 이 분은 <천주실의> 를 저술한 마테오 리치이십니다.”(18쪽) 두 성인과 감개무량한 해후를 한 다산은 회혼식날 아침 병든 몸을 일으키지 못한다. 천주실의>
다산 말년에 도달한 사상적 경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첫 장면 이후 소설은 그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출사(出仕)하는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암행어사 시절 탐관오리로 파직시켰던 노론의 거두 서용보의 집요한 견제에도 왕의 비호 아래 건재했던 다산은 정조 사후 ‘천주쟁이’로 몰려 오랜 유배길에 들어선다.
다산의 전성기를 그린 1권에선 계몽군주의 지지와 정적들의 공세 아래 새로운 사상을 펼치고자 했던 다산의 행적이 진진하게 펼쳐지고, 유배 생활을 그린 2권에선 불교ㆍ유교ㆍ서학을 아우르며 독창적인 사유 체계를 구축해가는 다산의 지적 행보가 핍진하게 그려져 그의 인생 후반부가 결코 몰락의 세월이 아니었음을 방증한다.
여러 저작을 통해 소개돼 익숙한 듯 여겨지는 다산의 생애와 사상이 40년 관록의 작가를 통해 싱싱한 문학적 생명력을 얻었다. 격식에 갇히지 않은,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이 나비처럼 너울댄다. 다산 사상의 핵심이 주자학과 천주학의 공생이란 관점에서 정약용의 지적 편력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그의 형 정약종이 형제들과 달리 끝내 천주교 신앙을 고수하며 순교한 이유를 어린 날 성장 과정으로 설명한 부분 등은 다산에 대한 작가의 깊은 공부를 증거한다.
평이한 시어로 빚은 묵직한 감동
<달 긷는 집> 엔 한씨가 <노을 아래로 파도를 줍다> (1999) 출간 후 틈틈이 써온 71편의 시를 묶였다. ‘꽃’ ‘무위사에서 만난 구름’ ‘토굴 다담(茶談)’ ‘사랑하는 나의 허방’ ‘고향의 달’ 등 5장으로 구성된 이 시집에서 작가는 평이한 시어로 묵직한 감동을 전한다. 노을> 달>
첫 장인 ‘꽃’에서 시인은 다종한 꽃들을 관능의 대상으로 불러낸다. ‘저 세상 돌아갈 때는 추한 모습 보여주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깊이 수장시켜버리는 그녀/ 아, 그녀의 깊고 그윽한 알몸의 영원한 잠이여.’(‘흰 수련꽃’) 들국화 향기를 맡는 행위는 이렇게 표현된다. ‘그녀의 황금색 자궁에다 코를 대고 킁킁거렸는데/ 그녀가 내 속으로 빨려들어왔고 내가 그녀 속으로 스며들어갔고/…’(‘들국화’)
97년 낙향해 ‘해산토굴’이란 당호의 집필실을 마련한 한씨의 일상은 연작시 ‘토굴 다담’ ‘사랑하는 나의 허방’에서 엿볼 수 있다. 인생 황혼기를 맞은 시인의 생에 대한 자세, 죽음에 대한 사유가 오롯한 시편들이다. ‘차갑게 식은 차가 말합니다,/ 저 눈벌판처럼/ 마음을 비우라고.’(‘사랑 타령-토굴 다담 3’) 식지 않은 문학적 열정도 노래한다. ‘내가 늘 하늘을 보는 까닭은/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 내가 최후에 남겨야 할 말 아닌/ 말/ 하나가 거기 있어서입니다.’(‘내가 늘 하늘을 보는 까닭은-토굴 다담 18’)
시집 말미엔 자신을 작가로 길러준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생을 증언하는 헌시가 있어 눈길을 끈다. ‘내 늘그막의 허방’ 등 일부 수록시는 이번 소설 속에 녹아 있어서 한승원 시와 소설의 길항관계를 엿보게 한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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