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 앞에는 늘 ‘재주꾼’ ‘다재다능’ 같은 수식어가 붙는다. 스물 네 살에 방송사 개그작가로 데뷔해 극작가, 연극연출가,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심지어 CF감독에 라디오 DJ까지 이야기꾼이 할 수 있는 일 치고 안 해본 일이 없다.
하는 일만 많은 게 아니다. 성적도 좋아서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한 <웰컴 투 동막골> 은 800만명이 관람한 ‘국민영화’가 됐고, 올 초 연극판으로 돌아와 만든 <서툰 사람들> 도 흥행에 성공, 큰 흑자를 냈다. 바로 장진(37) 감독이다. 서툰> 웰컴>
그가 이번엔 강우석 감독이 만든 회심의 영화 <강철중: 공공의 적 1-1> 의 시나리오 작가로 다시 한번 화제의 중심에 섰다. 그가 대표로 있는 서울 대학로의 필름있수다 사무실에서 만난 장진은 소문대로 배우 뺨치는 스타일과 ‘간지’의 보유자였다. 말은 빠르고, 거침 없었다. 강철중:>
- <강철중> 은 어떻게 시나리오대로 잘 나왔던가요? 강철중>
“강 감독님이 알아서 잘 버무리신 것 같아요. 아유, 만든 사람 입장에서는 좋은 것도 있고, 또 아쉬운 것도 있고 그렇죠. 강 감독님이 신나게 만드셔서 그런지 작품이 스트레스 없이 잘 간 것 같아요.”
- 관객은 얼마나 들 것 같으세요? 강우석 감독님의 잇단 흥행실패를 만회해줄 기대작인데.
“모르겠어요. 3주차가 딱 고비일 것 같은데…. 3주차 되기 전에 300만 어느 지점을 넘어가면 3주차 주말부터 힘 받아서 원하는 숫자까지 가는 거고, 그게 좀 안 되면 약간 더디게 갈 것 같고…. 지금 감독님이 미니멈 500만명이라고 하시니까, 그건 500만과 단위수가 다른 숫자 사이의 어느 지점인데, 그러려면은 3주차 되기 전에 300만이 가야 돼요.”
- 개런티를 안 받고 시나리오를 써주셨다면서요?
“그런 걸 뭘 받아요.”
- 왜 안 받아요? 원래 공짜로 잘 써주세요?
“시나리오야 제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비싸게 받는 클래스죠. 근데 그건 무의미한 것 같아요. 감독님한테 제가 개런티를 얘기하는 것도 그렇고, 10년 넘게 강 감독님이랑 함께 오면서 감독님은 ‘언젠가 한번 시나리오 써라’ 하셨고, 저도 ‘아, 써야 되는데’ 이렇게 하다가 기어코 한번 쓴 건데, 그것도 같이 차린 제작사에서 쓰는데요, 뭘.”(각기 영화사 필름있수다와 시네마서비스의 대표인 그와 강 감독은 3년 전 함께 KnJ라는 별도의 영화제작사를 차렸다.)
- 흥행 대박이 터져서 1,000만명이 보더라도 감독님은 손가락 빨고 있는 거예요, 그럼?
“강 감독님이 편집 끝나고 딱 나오더니 나한테 집 알아 보라고 그러던데요, 집 사준다고.(웃음) 제가 아직 전세 사니까.”
- 시나리오를 써주기로 한 약속을 왜 하필이면 <강철중> 으로 지키셨어요? <공공의 적> 1,2편에 이은 속편이라 상상력이 대단히 제한되잖아요. 공공의> 강철중>
“감독님이 그때 되게 힘든 시기셨어요. 이런 식의 영화를 빨리 만들고 싶었는데 전작 했던 작가들과는 지금 안 맞았고, ‘이걸 어떡해야 되냐. 니가 안 한다고 하면 엎을란다’ 이러시니까. 내가 그렇게 큰 스트레스 안 받고 써도 될 만한 스타일이었구요. 사실 시나리오 쓰는 게 힘들어요. 시나리오 쓸 때마다 명이 단축되는 것 같아서 남의 걸 잘 못 쓰게 돼요.”
- 강우석 감독과는 첫 공동작업인데 어떻게 만나셨어요?
“제 2회 부산영화제 때 제 첫 작품 <기막힌 사내들> 시사가 있었는데 끝나고 누가 보자고 하더라구요. 강우석 감독님이었어요. 그때 전 한국영화계에서 강 감독님의 존재감에 대해 잘 몰랐었어요. 기막힌>
이름만 알았지. 그 이후에 모든 작품을 강 감독님의 시네마서비스랑 함께 배급했는데, 강 감독님이 제 영화를 되게 잘 보시는 것 같아요. 제대로 보셔서 편집할 때 정말 정확한 도움을 많이 주시더라구요.
난 정말 좋았죠, 강우석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게. 이해하기 정확한 조언자 역할을 해주시는 분이 옆에 계시니까 되게 든든하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내게 결여돼 있는 대중적인 편안한 호흡을 그분은 아주 잘 찍어내시는 것 같아요.”
서울예대 연극영화과에서 연기를 전공한 그는 군대 시절 작법을 습작하면서 창작의 길로 들어섰고 이후 승승장구했다. 스물 넷에서 서른 일곱까지, 남들은 뭔가를 준비하며 보내는 무명의 젊은 시절을 그는 주류의 한복판에서 화려하게 보냈다. 그래서 그에겐 깊이가 없다고, 쉬이 조로할 거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 개그작가로 시작한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MBC 외주 프로덕션에 오디션을 봐서 예능국 작가로 일을 시작했어요. 군대에서 작법 습작하면서 코미디를 자주 썼었거든요. 사실 그 당시 다른 매체는 다 구성작가였고, 대본작가는 예능국이 가장 셌었어요. 코미디 드라마 꼭지들. (이)휘재가 했던 MBC <인생극장> 같은 걸 제가 썼죠. “ 인생극장>
- 재미있으셨어요?
“재밌었죠. 한참 ‘일발’ 받을 때고, 상복 터져가면서 일했으니까. 예능국이라는 게 맨날 아이디어, 회의, 수다 떨기 이런 거 하는 싸움이니까, 밤새도록 회의하다가 쓰고, 쓰고…. 그러다 1995년에 신춘문예에 희곡이 당선되면서 방송작가를 그만뒀어요.
신춘문예 되기 바로 한 달 전에 서울예대 문학상을 받았고, 그 다음달에는 연극협회에서 주는 상을 받았는데, 신인이 등용될 수 있는 데에선 꽤 큰 상을 연속으로 다다닥 받으면서 연극 쪽에서는 빨리 자리를 잡았어요.
선생님들이 많이 봐주셨어요, 그때. 윤대성, 차범석 선생님, 노경식 선생님, 임영웅 선생님…. 근데 너무 빨리 영화로 튀었죠. 같은 해에 <개 같은 날의 오후> 시나리오를 쓰면서 영화쪽으로 왔거든요. 개>
그러니까 선생님들 입장에서는 ‘저 녀석 좀 키워보려고 했더니 영화로 가버렸다’ 그런 생각이 드셨을 거예요. 그 다음엔 연극, 영화를 왔다갔다 했는데, 아직도 연극 쪽에 빚이 있는 것 같고, 언젠간 다 던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어릴 때부터 이쪽 방면에 끼가 좀 있었나 봐요.
“좋아했죠.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연극을 보는 것도 좋아했고,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 하려고 예체능을 준비했으니까.”
- 원래 전공이 연기였는데, 어쩌다 연기로 안 풀리고 이렇게 되셨어요?
“연기 잘했어요, 나.(웃음) 그런데 연출하고 글 쓰다 보니까 연기를 잘 안 하게 되더라구요. 연기까지 하면은 연출, 극작을 한다는 게 진짜 힘들어요.”
- 참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떨치고 있는데, 하나에 집중하면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안 들어요?
“전 그렇게 못해요. 연극은 못 버리겠고, 대안매체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은 계속 있고…. 어릴 때부터 할리우드 키드로 시작한 게 아니기 때문에 영화에 내 인생을 바치겠다 그런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어요, 그건.”
- 창작 분야에서 젊은 나이에 성공한다는 게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두루 있을 것 같아요.
“전 좋은 점만 있다고 봐요. 내가 여태까지 만든 작품에서 무슨 해탈을 한 것도 아니고, 경지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더 준비하고 공부했으면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겠죠. 근데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창작은 수학적인 답을 얻는 게 아니잖아요. 그럼 내가 스물 여섯 살에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있는 거예요.
서른에는 못 만들어요, 그거. 그렇기 때문에 내 일기처럼, 내 인생을 지나오는 사실적 현상처럼 작품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지금 서른 일곱인데 50대 중견의 깊이를 내려고 하면 그건 흉내내는 거죠. 그런 식으론 작업이 안돼요. 나는 내가 그때 하고 싶은 작업들만 했거든요.
그렇다고 그걸 꼭 제도권 안에서, 시스템이 디자인된 그 안에서 할 필요는 없고, 혼자 캠을 들고 뭘 찍더라도 상관없어요. 다만 창작이라는 영역은 학습도 중요하지만 실행이 중요하다는 거죠. 예전엔 ‘일찍 시작하는 게 좋은 거 아니야’라고 후배들한테 얘기해주고 그랬는데, 지금은 뭐가 되든 부딪혀보라고 그래요.”
- 늘 재기발랄하다, 다재다능하다는 얘기를 듣는데, 삐딱하게 보는 사람들은 깊이가 없다고도 말해요. 동의하세요?
“그게 딱 나죠, 뭐. 깊이라는 게 삶의 굴곡도 좀 있고, 가정도 꾸려서 가정이 주는 즐거움 행복 고통 고민도 경험해보고 그러면서 나오는 건데, 전 아직까지 제가 살아왔던 시대보다도 한결 모자라게, 순하게 지내왔으니까 깊이가 뭐 얼마나 나오겠어요. 근데 세월이 가장 큰 ‘빽’이죠. 살다 보면 어떻게 생기지 않을까요?”
장진은 분류하자면 자기 색깔이 뚜렷한 감독에 속한다. 그의 영화엔 늘 엉뚱한 언어유희로 웃음을 유발하는 ‘장진 식 유머’가 있고, ‘장진 사단’이라 불리는 일군의 배우들이 등장한다. 각기 장르가 다를지라도 어딘가에서 꼭 장진의 냄새가 난다.
- 왜 늘 신하균, 정진영 같은 ‘장진 사단’의 배우들을 쓰는 거예요?
“그 질문은 ‘인터넷을 참조하세요’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많이 받았어요. 일단 오래 해왔고, 그들이 그다지 게으르거나 자기 정체를 쉽게 겪는 친구들이 아니라 늘 발전해요. 그래서 하면 할수록 새로운 것들을 많이 봐요. 그리고 흔히 얘기하는 코드가 되게 좋아요.
내가 영화적으로 ‘이게 옳은 이야기야’, ‘이건 나쁜 거야’ 할 때, 기본적인 선악, 혹은 기본적인 희로애락과 관련해서 그들이 저랑 되게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난 이런 게 정말 사랑이라고 생각해, 하면 그들도 비슷한 생각으로 같이 갈 수 있더라구요.”
- 사단에 남지 못하고 그냥 한번 왔다 가는 배우들은 서운해하지 않아요?
“그게 정상이죠, 사실. 늘 똑같은 배우들로 100을 채울 순 없잖아요. 그렇다고 사이가 안 좋은 배우는 없어요. 예를 들어 원빈이 됐건 신현준이 됐건 정준호가 됐건 지금도 너무 친하고, 너무 좋은 배우로 머릿속에 A颱構?있거든요. 언젠간 꼭 다시 해보고 싶은 배우들이고, 기회만 된다면 정말 그러고 싶어요.”
- 여배우들은 참 없는 것 같아요.
“(영화에) 여자가 잘 안 나오니까. 또 흔히 우리나라 젊은 여배우들이 선호하는 캐릭터가 잘 없어요.(웃음) 여태까지 기껏 잘 왔는데 이걸 해서 괜찮을까 그런 배역이 많아서….”
- 신하균, 정진영 같은 배우들은 흔히 감독님의 페르소나라고 하잖아요.
“페르소나라는 말은 독립영화에서나 발효될 수 있는 말이고, 상업영화에서 자기 페르소나를 어쩐다는 말은 너무 웃긴 표현이에요. 내가 예를 들어 안무가면, 내가 원하는 춤의 세계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육체를 가진 사람과 함께 작업을 해나가겠지만, 상업영화라는 건 들어간 자본만큼 회수를 해야 하는 게 가장 도덕적인 목표거든요.
남의 자본 가지고 실험영화 찍을 수 없으니까. 그럼 상업적인, 대중적인 어떤 걸 해야 되는데 내가 내 분신을 만들어서 그에게 내 영혼을 입히고 그런 건, 참 안 어울리는 말이에요.”
- 근데 신하균씨하고는 유독 느낌이 참 비슷해요.
“걔가 날 좀 많이 따라해요.(웃음) 학교 다닐 때부터(신하균은 그의 대학후배다.) 내가 운동화 사면 똑같은 거 따라 사고, 내가 도라지 담배 피우니까 지도 도라지 따라 피우고 그랬어요. 그래서 맨날 그러죠, 제가. 따라하지 말라고.”
- <웰컴 투 동막골> 로 국민영화까지 만들어냈는데, 돌이켜보면 지난 세월 관객과의 관계가 어땠던 것 같아요? 소통은 잘 된 편인가요? 웰컴>
“처음에는 편차가 좀 심했어요. 웃어도 공허한 웃음, 허무한 웃음이 많았고. 내가 하고자 하는 표현이나 얘기에 대한 공감이 급격하게 나눠졌어요. 이젠 그 편차가 점점 더 줄어드는 것 같은 건 느껴요.
진폭도 점점 좁아지고. 막대한 열광과 그만큼의 조소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데, 주류 한복판으로 들어올수록 전폭적 지지를 보내주는 마니아가 줄어드는 대신 대중적, 보편적인 옹호를 해주는 관객들이 점점 늘어나잖아요.
안타까워요, 어떤 면에서는. 섭섭한 게 있죠. 내 작품이 200만 넘어가고 800만이 되면 대중적인 큰 인지도를 얻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전폭적 지지를 보내주는, 그가 아직도 비주류와 아웃사이더로 머물러주기를 바라는 관객들의 응원이 줄어들게 되죠.”
- <웰컴 투 동막골> 은 왜 직접 감독하지 않았어요? 직접 만드는 영화와 남에게 맡기는 영화를 가르는 기준이 있나요? 웰컴>
“가장 큰 건 내 재능에 대한 한계죠. <동막골> 같은 건 영화로 펼쳐질 때 스케일과 스타일적인, 영화적인, 미술적인 어떤 것들이 필요해요. 그 재능은 나한테 없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이걸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거죠. 그 다음은 반복적인 작업이 안 되게 하려고요. 한번 했던 유형의 영화는 다시 만드는 게 큰 매력이 없어요.” 동막골>
- 작년에 열살 연하의 아름다운 아내를 얻으셨어요. 결혼하니까 좋아요?
“그럼요. 집에 가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얼마나 좋아요.”
- 아드님도 얼마 전에 낳으셨다면서요?
“백일 됐어요. 4개월. 그런데 얘가 객관적으로, 좀 괜찮아요.(웃음) 엄마를 많이 닮았어요.”
- 생활인이 되길 강요하는 결혼은 창작의 적 아니에요?
“삶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하느냐의 문제인데, 난 가정이 일순위예요. 가정이 없었을 때는 가정을 만들고 가정을 준비하는 게 가장 큰 일이었고.”
- 어떤 아버지가 되고 싶으세요?
“아버지가 되면 내가 잘 못한 거나 내가 가진 좋은 것을 가르쳐주고 내가 해보지 못한 영역을 아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었어요. 제 이상이었죠. 근데 요즘은 내가 주기보다는 막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요. 이상한 사교육 열풍을 막아야 되고, 수능시대를 막아야 되고, 또….”
- 음란동영상은요?
“그건 같이 즐겨보면 되고.(웃음) 나도 영문 모를, 진짜 머리 나쁜 몇몇이 만든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을 얘한테 입히지 말고 막아야 돼요. 난 가르치고 싶은 게 많은데 현실은 막아야 할 게 많은 거예요.
그런 생각만 와이프랑 맨날 하고 있어요. ‘너 지금 우리가 한강 남쪽에 살고 있지만, 강남 엄마들처럼 살면 안 된다’ 그러면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대요. 애가 지금 백일 지났는데 그러고 있어요.”
- 10년 넘게 이 일을 하면서 창작의 고비 같은 건 없었어요?
“창작의 한계에 부딪힌다는 건 없거든요. 그렇게 막 하이퀄리티를 지향하지 않으니까.(웃음) 하이퀄리티를 지향하려면 최고를 만들어야 하는데, 한국영화 100년사에 길이 남을 1등 작품을 만들려면 그거 어떻게 만들겠어요.
그냥 일단 하는 거지. 근데 창작욕, 창작 에너지에 대해서는 약간 그런 게 있어요. 특히 이런 회사, 조그만 조직이지만 조직을 같이 하고 있으면 훨씬 떨어지죠. 그러다 조직에 빚이 많아지면 그땐 바싹 올라가고.”
- 종국적으로는 어떤 작품을 만드는 감독이 되고 싶으세요?
“코미디는 정말 어렵지만 진짜 매력이 있어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코미디는 쉽게 잘 버리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도 나는 우디 앨런 그 할아버지가 그 나이에도 그렇게 썰렁한 유머들로 조크를 하는 걸 보면 훌륭하고 존경스러워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나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오래 살아 남아야죠. 지금도 제일로 아쉬운 건 우리 선배들, 한 15년 전에 진짜 천재 소리 들어가면서 이 판에서 최고였던 사람들, 기획영화 들어오고 프로듀서 시스템 들어오자마자 힘없이 없어졌는데, 그분들이 버텨줬으면 우리가 한결 더 편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내 바람은 언제까지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 사람은 이 판에서 꾸준히 하고 있는 사람’으로 되게 오래 살아 남아 있고 싶어요. 그리고 그가 갔던 길이 기존의 관습적인 영역이 아니었다고, 새로운 창구를 통해서 영화를 했고, 새로운 자본으로 연극을 했다고, 그렇게 남고 싶어요.
지금 메이저 주도의 이 판으로 계속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몇몇 예언자적인 훌륭한 친구들이 있어요. 저도 지금 그렇게 작업을 하고 있고. 과거처럼 군소 제공사들이 살아나서 스크린 100개, 150개 걸어도 작품만 좋으면 위너가 되는 그런 판이 빨리 돼야 해요. 다양한 영화들이 다양하게 깔리는 영화판이 되는 게 지금 위기의 가장 큰 타개방법이 아닐까 싶어요.”
aurevoir@hk.co.kr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넷한국일보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인터넷한국일보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