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은 19일 특별기자회견에서 자세를 한껏 낮췄다. 지난달 말 쇠고기 관련 담화 때에 비해 사과 수위를 한 단계 높였고 곳곳에서 솔직한 심경을 드러내 국민의 이해를 구했다.
대통령이 동일한 사안에 대해 두 번이나 대국민 사과를 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지금의 위기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이 대통령이 진솔하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국민의 이해와 사과를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고 기자회견의 서두를 열었다. 이어 이 대통령은 쇠고기 협상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연계돼 있어 어쩔 수 없이 서둘렀다는 점과 결과적으로 졸속으로 진행된 것을 자인했다.
지난번 담화 때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야당 등의 지적을 의식해서인지 15분 간의 모두 발언 중 “자책했다”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 “국민 요구를 꼼꼼히 헤아리지 못했다”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다” 등 4차례나 자성의 문구를 쏟아냈다. 두 번째 대국민 사과인 만큼 이번에도 국민에게 진정성을 보여 주지 못하면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이어 30개월령 이상 쇠고기에 대한 국내 수입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미국과의 협상이 뜻대로 안될 경우 외교적 마찰을 감수하더라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장관 고시를 무기 연기하는 초강수를 두겠다는 뜻도 밝혔다. 사실상 대통령이 모든 것을 걸고 30개월령 이상 쇠고기의 수입을 막겠다는 대국민 약속인 셈이다.
이날 대국민 사과로 볼 때 이 대통령의 향후 국정운영 기조는 급격히 유연해질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대운하도, 공기업 민영화도 국민의 뜻에 따라 추진 여부를 결정한다고 천명한 것은 이 같은 전망을 뒷받침해 준다. 인적쇄신도 국민 눈높이에 맞춰 대폭 개편하겠다고 했다.
여기에는 앞으로 정부가 국민과 소통하면서 변화해 갈 테니 이제는 믿고 지켜봐 달라는 당부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쇠고기 파동이 당장 가라앉을지는 미지수다. 촛불집회를 주도하고 있는 광우병국민대책회의는 여전히 전면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고, 통합민주당 등 야당도 “회견이 변명으로 일관해 실망스러웠다”고 비판했다.
결국 20일께 타결될 쇠고기 추가협상 결과와 함께 조만간 단행될 인적쇄신의 수준 등이 민심 회복의 열쇠가 될 전망이다.
● 쇠고기
"어떤 경우에도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는 우리 식탁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19일 30개월이상 된 쇠고기 수출입 규제로 쇠고기 정국에 배수의 진을 쳤다. 30개월령 이상 쇠고기 문제 해법과 관련, 미 정부의 보증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 재개도 없다고까지 했다. 재협상에 나서지 않으면 정권퇴진 운동도 불사하겠다는 촛불 민심으로 향하는 메시지이자 동시에 이날까지 확답을 주지 않고 있는 미측을 압박하는 메시지로도 읽혀질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대통령은 "우리는 (30개월 미만 쇠고기만 수입되도록) 미 정부의 직접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며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통화에서도 미측이 이것을 보장하지 않으면 쇠고기를 수입할 수 없다고 강력히 이야기했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진행중인 한ㆍ미 장관급 추가협상을 거론하며 "미국이 만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수입위생조건) 고시를 보류할 것이고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재개하지 않을 것이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재협상 대신 30개월이상 쇠고기 수입을 차단하는 추가협상 만으로 쇠고기 정국을 돌파하겠다는 기본 구상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 재협상 요구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의 신뢰 상실 등 후유증이 크기 때문에 국익의 관점에서 어렵다고 반박했다. "대통령으로서 국익을 지키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국민의 건강권을 지키면서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 방법으로 정부는 추가협상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이 밝힌 30개월이상 쇠고기 해법도 민간의 자율규제가 근간이다. '30개월 미만 쇠고기만 거래한다는 양국 민간업체간의 자율 합의→한국 수출용 30개월 미만 쇠고기에 대한 미 정부의 보증→30개월 이상이 들어올 경우 우리 정부 검역 중단'의 시나리오다.
이 대통령은 쇠고기협상을 졸속 타결한 배경에 대해 "선진국 도약을 위해 경제 성장 잠재력을 높이는 일이 시급하며, 이를 위해 한미FTA 비준이 지름길이라고 판단했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계속 거부하면 한미FTA가 연내 처리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다"고 설명했다.
처음으로 이번 쇠고기협상이 한ㆍ미자유무역협정(FTA)과 연계해서 처리됐다는 점을 시인한 것이다. 쇠고기협상이 한미FTA의 정치적 희생양이 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정부는 지금까지 이에 대해 '쇠고기 협상과 한미FTA는 별개의 정책적 판단이었다'고 밝혀왔기 때문에 주목된다.
● 인적 쇄신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 개편에 대해 "개인 책임보다는 새롭게 출발한다는 관점"이라고 밝히고 내각에 대해서는 "문제가 될 때마다 사람을 바꾸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없다"고 했다. 청와대 비서진은 대폭, 내각은 중폭으로 개편한다는 의미다.
이에 따라 20일 발표되는 청와대 개편의 경우 대통령실장과 수석, 대변인 등 9명의 보좌진 중 7명 안팎이 교체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당초 유임이 유력했던 곽승준 국정기획수석과 이동관 대변인도 쇄신 차원에서 교체될 가능성이 높다. 수석에 이어 1급 비서관들의 경우에도 직제 개편에 맞춰 상당수가 자리를 이동할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개편의 핵심 포인트인 대통령실장에는 정정길 울산대 총장이 확정적이다. 정 총장은 영남 출신이라는 점이 부담이지만 이 대통령과 6ㆍ3 동지로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지기인데다 학계의 높은 평판, 총장으로서의 행정능력, 부처(농수산부) 근무경력, 신중한 처신 등이 높은 평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내각의 경우 이 대통령은 "과거 정권을 보면 장관들의 평균 임기가 정말 짧았다"면서 "인사를 제대로 하고 그들에게 책임을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잦은 장관 교체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다. 이는 5명 안팎이 교체되는 중폭 개각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초점은 한승수 총리의 거취로 유임론이 당에서 나오고 있으나 정 총장의 대통령실장 기용을 고려, 화합 차원에서 호남이나 충청 출신의 총리 기용 가능성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 대통령은 또 경제부처 장관들에 대해 최근의 경제위기, 경제정책 혼선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쇠고기 파문의 주무 부처인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교체는 불가피하더라도 교체설이 나돌던 강만수 기획재정부, 이윤호 지식경제부,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은 일단 유임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청와대 관계자는 "경제부처 장관 교체의 대상과 폭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이 난 게 없다"면서 "현재로선 청와대 참모진 대폭 교체와 중폭 개각 등의 방향만 잡힌 상태"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원칙을 강조한 것일 뿐 유임을 확인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인적쇄신이 늦어지고 있는 배경에 대해 이 대통령은 "미국과의 협상을 벌이느라 늦어졌지만 청와대 수석은 이제 할 역할은 다 끝났고, 내각은 국회상황을 봐서 조속히 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다음 주 단행될 것으로 알려졌던 개각이 한참 미뤄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 인터넷
이명박 대통령이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면서 의사소통하는 폭이 넓어졌기 때문에 정부는 인터넷을 통한 소통방법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것은 뒤늦은 자성으로 풀이된다.
이 대통령이 두 번이나 국민 앞에 머리를 숙이게 만든 인터넷의 힘을 비로소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부당하게 인터넷을 통제한다든가 하는 구시대적 발상은 하고 있지 않다"고 강조한 것도 네티즌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한 달 이상 지속된 촛불집회는 네티즌들이 의견을 교환하고 정부를 향한 분노의 불길을 지폈던 온라인 공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정부는 사실상 아무런 대책 없이 손을 놓고 있었다. 경찰 사이버팀에서 불법적 내용의 댓글을 찾아내고 관련자를 처벌하는 네거티브에 주력했을 뿐 적극적으로 네티즌과 소통하려는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난달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장관 고시 발표를 앞두고 청와대가 반나절 동안 쇠고기 문제에 대한 네티즌의 질문을 받고 답변을 달아 준 일회성 행사가 전부였다.
이에 이 대통령은 청와대에 인터넷 전담 비서관을 두고 온라인 여론형성에 선도적으로 대응할 방침이다. 관련 부처와의 협조체제를 구축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네티즌이 한 번 돌린 마음을 다시 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염영남 기자 문향란기자 김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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