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가의 신음을 외면하는 것은 정부의 도리가 아니다. 게다가 동원할 수 있는 실탄도 있다. 과거처럼 빚(국채)을 낼 필요 없이, 지난해 쓰다 남은 돈(세계잉여금)을 활용하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17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추가경정(추경) 예산 편성안에 반대할 명분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두 가지가 영 거슬린다. 우선 절차가 그렇다. 현행 국가재정법은 추경 편성 요건을 3가지로 엄격히 제한한다. ‘경기침체 또는 대량실업 등 대내외 여건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가 그 중 하나다. 정부는 3차 오일쇼크를 방불케 하는 지금의 고유가 상황이 ‘중대한 변화’에 해당하는 만큼 현행법 하에서도 충분히 추경 편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중대’한지, 예산을 다시 짜야 할 만큼 ‘중대’한지는 충분히 논란거리다.
더 거슬리는 것은 추경 내용이다. ‘고유가 극복을 위한 민생안정 추경’이라지만, 지출내용은 철도 조기개통, 국도 대체 우회도로 건설, 자원개발펀드 투자, 석유공사 출자 등 대부분 ‘민생’에 동떨어져 있다. “당장 서민을 지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업”이라는 정부 주장도 일리는 있지만, 그렇다고 ‘중대한’ 추경 편성을 통해 집행해야 할 만큼 시급한 사안들은 결코 아니다. 이런 사업들은 민생추경에 슬그머니 ‘끼워넣기’할 것이 아니라, 본 예산으로 편성해 정기국회에서 심의 받는 것이 백번 옳다.
물론 정부의 손발을 꽁꽁 묶고 있는 현행 국가재정법은 확실히 문제투성이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이처럼 추경 요건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는 곳은 없다. 이석연 법제처장도 최근 “헌법에 보장된 정부의 추경 편성권을 명백히 침해한 위헌”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법을 고친 뒤 추경을 편성하는 것이 정도(正道)다. 당장 급한 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냐고 항변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정부 스스로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하물며 추경에 편승한 ‘끼워넣기’ 편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정부인식과 행태가 너무도 옹색해 보인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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