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통으로 불리는 한나라당 K의원이 최근 사석에서 근심어린 얼굴로 말했다. “6월 말이면 나라가 또 한번 뒤집어질 텐데, 걱정입니다.” 정권퇴진 운동으로까지 치달은 쇠고기 촛불시위로 혼날 만큼 혼났고 단련도 됐을 법한데, 그 후폭풍으로 공공기관 구조조정 등 주요 개혁과제가 모두 뒤로 밀리는 형국인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 놈의’ 종합부동산세, 재산세 고지서가 눈치도 없이 이달 말 나온다는 얘기였다.
줄거리는 이랬다. 17대 대선과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을 밀어준 도시 중산층의 ‘묻지마’ 지지 뒤에는 종부세 폭탄이 있었고, 후보들도 앞 다퉈 종부세 완화나 폐지를 약속했다, 그래서 바뀐 정권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러나 올해도 세부담이 경감되기는커녕 작년보다 많아진다, 집값은 제자리라고 해도 종부세와 재산세 과표가 각각 공시가격의 90%와 55%로 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유세 완화의 시기는 물론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정이 이러니 그나마 정권이 의지해온 중산층마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올지 모른다….
■ ‘잃어버린 10년'이 담긴 지표들
‘강부자’ 냄새와 체질을 벗지 못했다고 몰아붙일 수도 있으나 정부로서는 충분히 고민할 만한 내용이다. 종부세에 짓눌리는 어중간한 계층이 적지 않고, 세제에 불합리한 부분도 많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헌법책에만 있던 민주주의의 참뜻을 되살리는 데 기여했다는 비아냥 이상으로, 촛불 시위는 정책 프로세스의 사전 점검과 사후 대비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는 말도 된다. 하지만 “민생고통이 외환위기 때보다 심하다”고 여당 정책위의장이 꼬집는 지경이고 보면, 지금의 경제팀은 그런 고민의 수고를 접고 비켜주는 것이 옳다.
정부 출범 초기의 전열정비 시기를 거쳐 일을 좀 해보려고 하니 광우병 쇠고기 문제가 터져 정책을 펼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했다고 항변할 순 있을 것이다. 또 고유가와 글로벌 경기침체 등 대외환경이 워낙 나빴던 점도 들이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변명들이 역설적으로 인적 교체의 불가피성을 설명한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성장과 안정 사이를 널뛰듯 오가고, 고유가에 따른 물가 관리가 세계적 화두로 부각됐을 때 ‘지갑을 비울래, 직장을 잃을래’하며 고환율 정책을 밀어붙인 사람들이다. 천정부지 기름값으로 인한 물류파업이 한 달여 전부터 예고됐는데도 거의 손 놓고 있다가 뒤늦게 허둥대는 그들이다.
‘경제 살리기’를 이데올로기로 삼은 정권의 100일 성적표는 말 그대로 ‘잃어버린 10년’의 향수를 자극한다. 우선 5% 진입이 확실시되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7년 만에 최대다.
생산자물가와 수입물가는 1998년 수준으로 뛰었고, 수입 원자재물가는 27년 만에 최고를 기록했다. 10년 전까지 연 40만개 이상 늘어났던 일자리는 3개월째 20만개를 크게 밑돌고, 올 1~4월의 경상수지 적자 68억달러는 97년 이후 최대다.
전분기 대비 올 1분기 실질 국민소득은 오히려 줄어 5년 만에 기록을 세웠고, 단기외채의 급속한 증가로 9년 만에 대외채무가 채권보다 더 많은 순채무국 진입을 코앞에 뒀다. 올 성장률 전망은 하향조정 일색이다.
■ 경제팀 개편 없으면 외면당해
그러나 이륙 시동도 채 걸지 못한 ‘MB 747’을 탄 사람들이 불안해 하면서 서둘러 내리려고 하는 진정한 이유는 거센 폭풍우를 맞아 엔진이 식고 여기저기 빗물마저 새는 비행기 탓만은 아니다.
항공사 사장이 강조한 안전성을 믿기 어렵고, 그가 자랑한 조종사와 정비사 등 인적 자원의 밑천이 너무 부실하며, 그들끼리의 소통도 막혀 온갖 혼선을 자초하는 것이 더 큰 이유다.
이 비행기를 타면 정말로 10년 혹은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지 모른다는 의구심이다. 정책이든 정치든 운동이든 협상이든, 근본은 신뢰다. 신뢰가 없으니 고심 끝에 내놓은 정책도 포퓰리즘 처방이니 뒷북행정이니 하며 뭇매를 맞기 일쑤이고, 투약의 강도를 높일수록 부작용만 부각된다.
항공사 사장 본인의 처지도 곤궁한 터에 고집과 인연으로 사람을 쓸 때가 아니다. 대부분의 승객이 내릴까 말까 고민하는 지금이 닥쳐올 끔찍한 상황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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