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길종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니 잡혀왔다. 죽어도 좋다고 자진해 제나라로 돌아왔다.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하기 위해 3선 개헌을 하자 국내외로 반정부시위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중앙정보부는 광분하여 시위 주모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국외 거점은 한국교포와 유학생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미국 LA 였다. 바로 그곳에서 6년 전 ‘민통학련사건’으로 추방시켰던 하길종이 한국유학생신문을 발행하며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었으니 그대로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정부는 반정부운동을 하는 유학생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병역기피’등을 이유로 ‘강제소환령’을 내렸다. 응하지 않으면 가족이 피해를 입게 되어 있었다. 우리 집에도 벼락이 떨어졌다.
경제기획원 통계국장으로 재직 중인 큰형이 중앙정보부로 끌려가서 닦달을 받았다. “동생을 귀국시켜라. 아니면 사표를 내라.”
25년간 공무원 생활을 한 큰형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쓰러져 며칠을 일어나지 못했다. 가족들은 그 사실을 길종 형에게 알렸다.
길종 형은 주미한국대사관으로부터 신문을 폐간하라고 갖은 공갈과 협박을 받았지만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큰형이 결심을 하였다.
“나는 할 만큼 다하고 살았다. 돌아오지 말고, 그곳에서 네 소신을 펼쳐라.” 그리곤 사표를 제출했다. 이 소식을 들은 길종 형은 자신 때문에 큰형을 희생시킬 수 없다며 귀국 보따리를 쌌다.
당시 그는 UCLA 대학원 영화과 졸업 작품 로 MGM상을 수상하여, 미국의 최대 영화사 MGM사로부터 감독제의를 받은 상태였다. <대부> 의 코폴라 감독, <스타워즈> 의 루커스 감독과 함께 가장 촉망받는 감독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스타워즈> 대부>
형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수색 육군훈련소로 끌려갔다. 추운 겨울이었다. 그를 도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보고 싶던 형이 공항에서 헌병 지프에 실려가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리고 결국 해 냈다.
나는 번쩍거리는 세단을 몰고 수색으로 향했다. 다분히 의도적인 ‘번쩍거리는 세단’이었다. 과시와 위세가 생각보다 더 약발이 받던 시대였다. 형은 내무반에 없었다. 그는 그 추운 겨울날 아무 죄도 없이 산꼭대기 벙커에서 홀로 기합을 받고 있었다.
잠시 후, 까까머리의 형이 조교를 앞세우고 달려 내려왔다. 부동자세로 서서 경례를 하는 형을 보고 나는 껄껄대며 달려가 그를 껴안았다. 우리는 웃다가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형은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세단 한 대가 부대 안으로 들어오더라. 순간 네가 오는구나 했다”고 하였다. 다시 콧등이 서늘해졌다.
형은 지쳐 있었고 누군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형의 빡빡 머리를 쓰다듬었다. 왠지 내가 형인 기분이 들었다. 몇 주의 훈련을 마치고 형이 집으로 돌아왔다. 이어 형수가 이제 막 돌 지난 조카 지현을 안고 귀국하였다.
그때 처음 본 형수였지만 그동안의 편지 왕래로 옆에 있던 사람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조카의 재롱을 보며 그동안의 시름을 달랠 수 있었다.
형은 곧 영화를 만들 준비에 나섰다. 미국에 있는 동안 절친한 친구인 시인 김지하 형과 ‘동학민란’을 소재로 공동집필한 시나리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를 들고 영화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매번 허사였다. 이미 중앙정보부가 모든 영화사에 손을 쓴 뒤였고 사실상 하길종의 활동은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다. 새야>
<동학혁명> 또한 절대로 제작할 수 없는 소재였다. 당시 모든 영화는 시나리오가 사전검열에 통과되어야만 제작될 수 있었다. 하길종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술고래에 골초였던 그는 이제, 맥주 한 잔, 담배 한 모금에 취해 쓰러졌다. 동학혁명>
6년간의 미국 생활 동안 술 한 잔, 담배 한 모금 ‘빨’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매일 술독에 빠져 줄담배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영화를 만들 수 없게 되자 그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 신문과 잡지에 영화평을 쓰고 대학에서 영화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는 처질대로 쳐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김지하 형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며칠간 형은 두문불출했다. 지하 형이 우리 집에 와있는 것을 절대 비밀로 하라는 형의 엄명이 떨어졌다. 나는 그들이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줄로만 알았다.
얼마가 지난 후, 한밤중에 김지하 형이 급히 사라졌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난 새벽, 집안에 초인종이 무섭게 울렸다. 식구들이 모두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검은 복장을 한 남자들이 구두 발로 집안으로 달려 들어와 뒤지기 시작했다. “김지하 어딨어!!”
식구들의 눈이 커졌다. 그들은 다짜고짜 길종 형을 검은 지프에 태우고 사라졌다. 우리는 입도 떼지도 못하고 그대로 보고 있어야만 했다. 형의 행방도 모른 채 며칠이 지났다. <오적(五賊)> 사건이 마침내 일간지 톱기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오적(五賊)>
당시 재벌, 국회의원, 공무원, 군장성, 장차관 등을 다섯 도둑으로 몰아붙인 시 <오적> 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사상계> 를 폐간시킨 정보기관이 김지하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는데 보도관제로 우리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조간에 <김지하 체포> 제목이 톱으로 실렸다. 이만희 감독 영화 <청녀> 의 촬영현장에서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청녀> 김지하> 사상계> 오적>
형이 돌아왔다. 피멍투성이었다. 나는 쓰러져가는 형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반드시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홍콩에서 내가 썼던 이효석 원작의 <화분> 시나리오를 내 놓았다. 그가 무릎을 치며 좋아했다. 나는 수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했다. 화분>
검열, 돈, 제도... 어느 하나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하길종의 등장’을 위해서는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동안 국내외에서 쌓아 온 경험이 유일한 재산이요, 사선을 돌파할 무기였다. 마침내 하길종의 첫 작품 <화분> 이 크랭크 인 되는 날이 왔다. 화분>
1970년 겨울 새벽, 하길종 감독의 첫 ‘레디, 카메라. 액션! ’ 육성이 서울 수유리 숲길에서 메아리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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