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로 들어서면 여행자는 묘한 흥분에 들뜬다. 인적이 닿지 않은 처녀림을 딛고 서면, 머릿속은 사냥을 위해 숲을 누비던 조상의 기억으로 빠르게 되감기 버튼을 누른다. 차가운 문명의 이성은 밀림의 더운 비를 맞으며 재부팅되고, 도시인의 삐걱거리던 나약한 관절은 강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열대우림의 스콜을 먹고 자란 밀림의 생명체들은 마치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는듯 커다랗게 시야를 가리고, 등줄기는 치솟는 엔도르핀으로 얼음처럼 식어간다.
말레이시아의 정글은 아마존의 그것과 비교된다. 전 지구에 공급되는 산소량의 20% 이상을 뿜어낸다는 말레이시아 밀림으로의 트레킹. 야성을 잃은 여행자들의 심장을 뛰게 한다.
말레이시아 바코 국립공원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물루 국립공원의 원시림으로 향했다. 두 곳 모두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비행기로 1시간 반 정도 날아가야 하는 보르네오 섬의 사라왁 주에 속해 있다. 북동쪽으로 세계 최고 부국 브루나이와 접하고 남쪽으로 인도네시아와 경계를 맞댄 사라왁은 아직도 많은 원시부족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울창한 정글과 유려한 남중국해의 해변, 그리고 수만년 동안 웅장함을 과시해온 석회암 동굴들이 가득한 이곳은 국내 여행객들에겐 직항로가 없다는 이유로 아직 낯설다. 오지여행, 산악 트레킹을 즐기는 유럽인들이 관광객의 다수를 차지한다.
■ 자연사박물관의 회랑을 걷듯
바코 국립공원은 사라왁의 주도 쿠칭(‘고양이’라는 뜻) 시에 속해있다. 쿠칭 시내에서 버스로 40분 정도 달리면 남중국해와 인접한 바코 국립공원의 입구에 도착한다.
구명조끼를 입은 뒤 소형 모터보트를 타고 20여분 강을 거슬러 가면 관광객등록센터(원시림의 훼손을 막기 위해 공원이 관광객의 입장 등록을 요구한다)에 이른다. 맹글로브 숲으로 뒤덮인 밀림의 초입은 뿌연 물안개로 오지에 도착한 여행자를 맞는다.
마침 잔뜩 흐린 구름이 비를 뿌렸다. 원시림의 녹색은 비를 머금자 더욱 짙어지고, 회색에 익숙한 ‘문명의 시력’은 순식간에 감각을 잃는다. 갑자기 밝은 빛이 사라진 어둠 속을 걸어가듯, 쏟아져 들어오는 녹색의 이미지에 눈이 멀어버릴 지경이다.
‘후두둑’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뛰어넘는 긴코원숭이, 사람의 발자국을 아슬아슬 피하는 대형 지네의 자취가 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앞선 가이드가 “세상 때가 가득 차서 숲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라며 웃어보인다. 정글 트레킹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여행자는 자신의 체력에 맞는 코스를 고를 수 있다. 0.8㎞에서 6㎞가 넘는 장거리 코스까지 다양하다.
비를 맞으며 트레킹을 시작했지만 손에 쥔 카메라와 미끄러운 진흙만 주의한다면 크게 힘들지 않다. 무한대로 확장해놓은 자연사박물관의 회랑을 걷는 기분이랄까. 울창한 밀림 덕분에 하늘에선 장대비가 쏟아져도 옷은 많이 젖지 않는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이름 모를 유충, 벌레잡이 풀, 비아그라의 원료로 쓰인다는 나무 등이 여행자의 눈길을 잡는다.
트레킹 코스는 다양하지만 그 끝은 대부분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투명한 열대의 해변으로 닿는다. 보트를 타고 기암괴석의 바다를 둘러보거나, 트레킹복 안에 수영복을 입었다면 그대로 해수욕을 즐기면 된다.
휴양지에 반드시 에어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비에 젖어가며 즐기는 원시적인 삼림욕이 두렵지 않다면, 공원 주변 저렴한 롯지에서의 하룻밤도 즐겁지 않을까.
■ 박쥐의 군무가 아름다운 석양
물루 국립공원으로 떠나는 길은 조금 복잡하다. 쿠칭 공항에서 브루나이 접경지역인 미리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다시 물루행 비행기로 갈아탄다. 물루 국립공원을 찾기 위해서는 물루의 유일한 리조트인 ‘로얄 물루 리조트’에 여정을 풀어야 한다.
여기서 다시 차로 10분 정도 달리면 세계 최대 석회암 동굴 중 하나인 ‘디어 케이브’로 향하는 왕복 6㎞의 트레킹 코스 입구에 닿는다. 바코 국립공원과 달리 이곳은 나무판으로 깔끔하게 길을 내 걷는데 큰 지장이 없다. 하지만 물루의 정글은 바코보다 훨씬 깊고 독충의 위협이 심하기 때문에 긴팔 상의와 긴바지, 모기약을 반드시 준비하는 등 신경써야 할 게 많다.
트레킹 약 1시간, 디어 케이브가 큰 입을 벌리고 여행객을 맞는다. 40여대의 대형 여객기가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이 동굴은 인근의 윈드 동굴, 클리어워터 동굴 등과 이으면 길이가 무려 100㎞에 달한다.
디어 케이브가 자랑하는 볼거리는 석양과 함께 찾아온다. 낮 동안 동굴에서 잠자던 수만 마리의 박쥐들이 해거름에 맞춰 무리를 지어 동굴 밖으로 날아 오른다. 곤충 사냥을 위해 하늘로 일제히 날아오르는 박쥐떼를 관찰하기 위해 공원은 CCTV를 동굴 곳곳에 설치, 자연이 그리는 라이브 다큐멘터리를 중계방송해준다.
박쥐들의 군무는 사?인간의 눈에는 아름답게 비치지만, 먹이사슬이 처절하게 돌아가는 현장이기도 하다. 곤충을 향해 몸을 던지는 박쥐떼, 이를 좇는 매와 독수리들의 추격전. 덕분에 열대의 밤하늘은 쉽게 식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트레킹은 지루할 틈이 없다. 이미 정글은 어두워져 사위는 한치도 알아볼 수 없는 정적에 휩싸였지만 마치 내 어깨 위에서 들리는 듯 또렷한 생물들의 울음소리, 반딧불이의 비행이 끊임없이 즐길거리를 주기 때문이다.
정글에선 세상에서 익숙해진 감각의 볼륨을 줄여야 한다. 그래야 자연과 나누는 스킨십이 훨씬 뜨겁게 느껴진다. 이게 정글 트레킹의 진짜 매력이다.
쿠칭(말레이시아)=양홍주 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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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수첩/ 말레이시아
▲ 대한항공과 말레이시아항공이 인천_쿠알라룸푸르 직항노선을 매일 2편 운항한다. 비행시간은 6시간 30분 정도. 쿠칭과 미리, 물루는 말레이시아 국내선 항공기로 쉽게 연결된다.
▲ 말레이시아 생활물가는 서울과 거의 비슷하지만 이슬람 국가인 만큼 주류는 한국보다 비싸고, 산유국이기 때문에 기름값이나 전기세는 한국의 절반 수준이다. 화폐 단위는 링깃, 1링깃은 약 310원 정도로 국내에서 환전이 가능하다.
말레이시아 도심 은행이나 환전상에서 미국 달러를 링깃으로 바꿀 수 있는데, 몇몇 호텔에서는 2004년 이전 발행된 달러는 교환해주지 않는다.
▲ 이슬람 국가이므로 왼손 사용과 검지로 방향을 가리키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영국의 영향으로 차량은 좌측통행을 한다. 무슬림들이 도심에 모이는 금요일 오후에 교통체증이 심하다.
▲ 연평균 기온은 30도, 우기(11~1월)가 아니라도 수시로 폭우가 쏟아지는 만큼 우산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양홍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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