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강산(井岡山)에서 세력을 키운 마오(毛澤東)는 산을 내려 와 국민당이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장시(江西)성의 루이진(瑞金)지역을 장악했다. 1931년 중국공산당은 장시성을 중심으로 그 인근지역에 인구 1,000만명의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했다.
수도는 마오가 루이진으로 정했고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마오를 국가수반인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임명했다(당시 모스코바는 대부분의 자금을 제공하고 있어서 중국공산당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중앙당이 위험한 상하이(上海)를 떠나 안전한 루이진으로 이동해오면서 당서기인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모든 것을 관장했다. 이후 모스코바에서 유학한 스물 다섯 살의 청년 보구(博古)가 소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도착해 당을 장악했다.
코민테른이 파견한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도 도착했다. 이로써 중국공산당을 움직이는 삼두체제가 자리 잡았다. 마오는 권력에서 소외됐다.
한편 국민당군은 이들에 대한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마오는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홍군을 소부대를 나누어 유격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패배주의로 비판을 받았다. 홍군은 적의 약점을 이용해 네 차례의 포위작전을 모두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1934년 들어 국민당군은 100만 대군을 동원한 5차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삼인위원회는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국민당군의 포위를 뚫고 나가 다른 곳에 있는 홍군과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장정을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중 자신들이 결정한 이 같은 홍군의 이동이 1만km의 역사적인 장정이 되리라고 알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는 마오도, 장제스(張介石)도 마찬가지였다.
■ 원조 논쟁
저녁 늦게 루이진에 도착해 찾은 곳은 홍군광장. 31년 11월7일 중국공산당이 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하고 마오를 주석으로 선출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잔디가 깔린 바닥에는 하얀 돌로 ‘선열들의 발자취를 따라서’라고 써있었고 그 글씨가 끝나는 곳에 포탄모양을 한 붉은 색의 높은 기념탑이 나타났다.
루이진의 상징이 된 홍군열사기념탑이었다. ‘기이한 살생부’(루이진에 남을 사람들의 명단)에 의해 주력군이 루이진을 빠져 나가도록 이곳에 남아 국민당군과 싸우다가 옥쇄한 이름 없는 홍군들을 생각했다. 그들이야 말로 잊혀진 장정의 진정한 영웅들이 아닌가.
해가 진 캄캄한 밤길로 루이진을 벗어나자 루이진시의 경계에 ‘장정 출발지 루이진’이라는 현수막이 나타났다. 오던 길에 지나온 위두(于都)에서도 ‘장정 출발지 위두’라는 현수막을 본 기억이 났다. 그럼 장정 출발지가 두 군데란 말인가? 한마디로 마포에 가면 여러 군데서 볼 수 있는 ‘원조 최대포’ 간판과 같은 ‘원조 논쟁’이다.
장정 출발지 원조는 과연 어디일까. 루이진인가, 위두인가? 분위기는 압도적으로 위두이다. 루이진에는 소비에트임시정부 흔적 등은 남아 있지만 장정과 관련된 제대로 된 기념관이 없다. 그러나 위두에는 거대한 장정 기념관과 장정 기념탑 등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장정출발을 하려면 루이진이 아니라 위두로 간다.
물론 당지도부가 위두를 장정의 도강지점으로 선택해 34년 7월 루이진에서 위두로 사령부를 옮기고 장정을 준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소비에트정부와 주력군은 루이진에 있었고 위두가 루이진의 서쪽에 위치해 루이진에서 위두를 통해 서쪽으로 장정을 떠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루이진이 장정의 출발지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즉 ‘원 출발지’는 분명히 루이진이었다. 참가자들만 해도 그렇다. 루이진은 당시 23만명 인구에 3만5,000명이 장정에 참가해 1만명이 희생됐다. 위두는 비슷한 22만명 인구에 1만6,000명이 참가해 1만명이 희생됐다. 숫적으로도 루이진이 우세하다.
그렇다면 왜 원조논쟁에서 위두가 우세인가. 간단하다. 출발당시 당지도부가 위두에 옮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마오가 위두로부터 장정을 떠났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는 승자의 역사이고 따라서 원조논쟁에도 권력관계가 개입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가들이나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장정 출발당시 마오가 어디에서 출발했느냐는 것이지 원래 소비에트수도는 어디였고 주력군이 어디서 출발했는가가 아니다.
“이 세상에 참과 거짓은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란 결국 자신의 주장이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권력관계를 의미한다”는 프랑스 철학자 푸코의 주장이 생각났다. 역사가 기억을 둘러싼 정치투쟁인 것이 바로 이 같은 이유이다.
기념관 가는 길은 공사 중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기념관을 가기 위해 이리 저리 헤맸다. 거기에는 위두강의 도하를 기념하는 기념탑이 있었고 그 뒤에 기념관이 있었다. 기념관에 들어가자 장정을 결정한 3인방의 얼굴로부터 장정을 위해 위두강을 건너기 위한 부교를 만드는데 사용했던 문짝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군인 신발 만들기 등 위두 주민들이 장정을 떠나는 홍군을 위해 했던 다양한 지원들을 유형별로 그려 놓은 것이다.
홍군과 민중은 물과 물고기과 같은 관계여서 민중의 지지가 없으면 홍군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마오의 지적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도하지점에 기념돌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뒤로 배가 놓여 있었다.
이 같은 배 800척을 동원해 부교를 여러 개 설치하고 34년 10월16일 저녁 6시 횃불을 켜고 강을 건너 장정을 시작한 것이다. 마오는 말라리아의 후유증 때문에 들것에 실려 강을 건넜다. 당시 그는 마흔 살이었다.
74년 전 마오가 건넌 위두강은 모래를 캐내기 위한 준설작업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엉망이 되어 옛날의 맛은 나지 않았지만 강을 바라보고 있자 이날 열 명의 자식 중 여덟 명을 장정에 떠나보냈다는 위두의 한 어머니 통곡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49년 홍군이 장제스군에 승리한 뒤 위두를 지나간다고 해서 이 어머니는 3일 밤낮을 잠도 자지 않고 거리에 나와 자식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 99살의 노홍군을 만나다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해 99살의 장정 참여 노(老)홍군을 만났다. 홍군 모자를 쓰고 나타난 그는 생각 밖으로 건강했지만 귀가 어두워 대화를 나누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놀라며 반가워 했다.
한국에서 준비해간 사탕을 선물하고 기념품으로 만들어간 장정 기념 손목시계도 직접 손목에 채워드렸다. 막내아들이 중간에서 통역을 해주어 청바오양(曾保樣) 할아버지를 상대로 인터뷰를 했다.
-언제, 왜 홍군이 가담했습니까?
“22살이었던 1932년이었어. 당시 소작을 짓는 소작농이었지. 그런데 농민과 일하는 사람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어준다고 하니 주저 없이 참가했어.”
-장정 중 무슨 일을 하셨는지요?
“펑더화이(彭德懷)부대에서 기관총사수를 했지. 7kg이나 나가는 기관총을 메고 다녔어. 한번 져봐, 얼마나 무거운지.”
-가장 힘들었고 위험했던 일은 뭐였던가요?
“라오산(老山)이나 대설산 같은 고산을 넘는 것이었지. 가파른데다가 산소가 부족해 여러 번 기절할 뻔했어. 내 부대에서 7~8명만 살아 남았지만 나는 상처하나 안 입었지. 다 하늘에 계신 상제님이 돌봐주신 것이지. 그래서 이후 그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소고기를 안 먹어.”
-장정 후 무엇을 했습니까?
“옌안(延安)에 있다가 일본이 망한 뒤 장제스군과의 해방전쟁에까지 참전하고 당의 배려로 결혼했다가 53년 고향으로 돌아왔어. 장정 전에는 글을 못 읽었는데 장정 중 글을 배워 귀향한 뒤에는 정부의 농업생활조합 같은 데서 창고관리원으로 일했어. 장정 참여했다고 정부가 30년 전 5,000위엔을 지원해줘서 지금의 집을 지었어.”
-자녀는 어떻게 되세요?
“3남 1녀고 마누라는 5년 전에 노환으로 죽었어. 현재 막내가 나를 모시고 있지.”
서강대 정외과 교수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넷한국일보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인터넷한국일보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