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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제정 35회 서울보훈대상/ 영예의 수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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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제정 35회 서울보훈대상/ 영예의 수상자들

입력
2008.06.17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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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이군경 부문 박형구씨, 보훈회관 시설 장애인에게도 개방

신태인상업고를 나온 박형구(朴亨九ㆍ62)씨는 1969년 12월 육군 11시단 수색중대 복무 중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맹호기갑연대 2대대로 편제됐던 그는 71년 4월 17일 푸캅산지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신에 파편상을 입고 본국으로 후송됐다. 이로 인해 무공훈장까지 받았지만 상이 3급의 장애는 그에게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다가왔다.

71년 9월 명예제대한 그는 전역 후 보상금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친척의 도움을 받아 식당을 운영했지만 경험 부족 등으로 실패의 쓴 맛을 봐야 했다. 하지만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식당으로 다시 일어선 끝에 결국 자립 기반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갖게 된 박씨는 85년부터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서울 중구지회장을 맡아 지금껏 소임을 다하고 있다. 그는 그간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 풍토를 조성하는 일에 신경을 썼다.

회원 가정에 국가유공자 명패달아주기 운동을 전개해 회원들의 자긍심을 살려주는 한편 국가유공자 행세를 하며 금품을 요구하거나 물품을 강매하는 가짜 국가유공자를 가려내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관할 경찰관서의 협조를 통해 적발 단속한 가짜 상이자만 100여명에 이른다.

박씨는 특히 회원들의 숙원이던 중구보훈회관을 설립해 회원들의 종합 복지관으로 발전시킨 데 이어 보훈회관의 목욕탕을 보훈가족이 아닌 인근 장애인들에게도 개방, 더불어 사는 사회 구현에 앞장서고 있다. 보훈급여금과 식당 임대 수익금 등 사재를 털어 지금까지 관내 저소득층 회원 126명에게 1,300여만원 가량을 지원하기도 했다.

■ 상이군경 부문 김우동씨, 유공자 자녀들과 '더불어 살기' 실천

상이 5급 국가유공자인 김우동(金宇東ㆍ48) 서울메트로(옛 지하철공사) 일원역 부역장은 서울메트로 내 '보훈회'를 설립하고, 20여년 동안 정성으로 가꾼 보훈회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가 입사 이듬해인 1986년 설립한 보훈회는 현재 450명 가까운 회원들과 함께 뜻 깊은 나라사랑 및 봉사활동을 이어감으로써, 나라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보훈가족들이 오히려 나라에 더 큰 사랑을 돌려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김씨는 78년 고등학교를 졸업 후 바로 군에 입대해 수도기갑사단 기갑대대에서 복무하던 중 부상을 입고, 82년 수도통합병원에서 전역했다. 85년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지금의 직장에 입사했고, 86년 호국보훈의식 선양과 사회봉사를 목적으로 직장 내 국가유공자 및 자녀들이 모임인 보훈회를 설립했다.

나라의 부름으로 입대했던 군대는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지만, 오히려 그는 나라에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직부장 및 사무국장을 맡아 보훈회를 키워냈고 2004년부터는 회장을 맡고 있다.

보훈회는 매년 생활이 어려운 국가유공자 자녀에게 장학금(총 125명에 2,000만원)을 지급해 왔다. 또 사회공헌을 위해 낙도어린이 초청 서울 견학 행사 및 결식아동 급식비 지원, 전방부대 위문품 전달 및 안보견학 등의 활발한 활동도 벌이고 있다.

매년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되면 현충일 참배객을 위한 음료봉사 활동 및 묘지 안내, 질서유지 등의 봉사활동으로 국가유공자 위상 제고에도 기여하고 있다.

■ 유족 부문 문춘식씨, 노인·저소득층의 '지팡이로'

문춘식(文春植ㆍ66)씨는 아직도 1986년 8월 17일을 잊지 못한다. 집안의 희망이었던 장남 병국씨는 이날 학사장교로 복무 중이던 최전방 철책 인근에서 지뢰폭발로 숨졌다. 제대를 7개월 앞둔 때였다. 하지만 언제까지 슬픔에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아들의 희생을 값지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세상에 남겨진 그에게 주어진 숙제였다.

문씨는 2002년 4월 전몰군경유족회 서울특별시지구 동대문구 지회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봉사를 시작했다. 회원 한 명, 한 명의 고단한 삶을 보듬어 나가는 일이 급선무였다.

국가유공자 유족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지켜낸 이 나라의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는 모습은 참기 어려웠다. 힘이 닿는 대로, 회원들이 필요로 하는 아주 작은 일에도 그는 하나하나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중풍 및 관절병을 앓고 있는 회원을 위해 가사도우미를 신청해 주고, 무료 당뇨검사ㆍ결핵 검진, 안경 맞춤권 지급 등 특히 고령회원을 위한 서비스에 신경을 썼다. 저소득 회원을 위해 쌀을 전해주고, 거동이 불편한 분들에게는 지팡이를 지원했다.

문씨는 또 2006년부터 현재까지 자연정화 활동 및 거리질서지키기 캠페인 등 총 26회의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발전에도 적극 기여하고 있다.

문씨는 현재까지 6년 간 지회장으로 활동하며 탁월한 지도력과 추진력을 발휘, 생활기반이 없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회원들을 격려하고 이끌어나가 그들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립ㆍ자활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노력을 해왔다.

■ 무공수훈 부문 정중근씨, 참전용사들 복지 증진 한평생

정중근(鄭重根ㆍ74)씨는 1947년 7월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기여한 국군 1세대다. 50년 전역대기 중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전역을 못하고 경북 칠곡의 다부동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서 싸웠다. 53년 6월 25일 화랑무공훈장을 받고, 54년 6월 육군 상사로 전역했다.

온 몸으로 전쟁을 이겨내며 국토를 수호했던 그는 전역 후에도 산업현장에서 다시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사력을 다했다. 73년 한일석재공업 총무부장으로 재임 중 능력을 인정받아 78년 한일석재공업 대표이사로 선임됐고 91년 퇴임할 때까지 13년 동안 회사를 경영하며 석재산업은 물론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위한 기수역할을 했다.

91년 산업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다시 참전용사로 돌아왔다. 95년 4월부터 다부동전투 참전자들로 구성된 '다부동전투 구국용사회' 부회장 및 '육탄10용사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당시 전투에서 희생된 전우들의 넋을 기리고 전승을 기념하는 추모제를 매년 개최했다.

정씨는 2000년 3월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서울 구로구지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특히 그는 전립선암으로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8년 여 동안 구로구 무공수훈자회를 이끌어오면서 개인보다는 회원들의 복지증진 및 나라사랑을 몸소 실천해 보임으로써 회원과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환경정화활동 등 사회봉사활동을 적극 펼쳐 지역사회발전에 기여하고, 독거노인 점심 제공 등 어려운 이웃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쏟고 있다.

■ 4·19혁명공로자 부문 이세현씨, 中동포 등 1700여명에 장학금

충남 청주에서 태어난 이세현(李世賢ㆍ66)씨는 1960년 청주상고 재학 중 4ㆍ19 혁명이 일어나자 학생회장으로 청주 지역의 반독재ㆍ부정선거 반대운동을 이끌었다. 경찰에 체포됐다 겨우 풀려난 그는 이후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받고,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이후 이씨는 충청북도 4ㆍ19연합회 회장, 4ㆍ19혁명공로자회 사무총장 등을 역임하며 4ㆍ19 혁명의 이념과 정신을 온전히 후대에 전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이 과정에서 그가 진심으로 전하고자 했던 것은 단지 4ㆍ19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 뿐만은 아니었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져오려 했던 4ㆍ19 혁명의 정신은, 민주주의가 정착된 지금 이 사회를 지키기 위한 봉사와 헌신으로 진화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장학사업. 이씨는 95년 100여명과 함께 '4ㆍ19민주장학회'(현 4ㆍ19육영사업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92년부터 3년간 4ㆍ19혁명공로자회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받은 월급과 퇴직금을 모두 모아 3,000만원의 장학기금을 기부했다.

이 장학회는 지금까지 형편이 어려운 중ㆍ고등학생 1,384명에게 총 3억원이 넘는 장학금을 지원했다. 중국의 동포 자녀들에게까지 관심을 넓혀 지금까지 360명에게 4,000여만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그는 중국 방문 중 방송을 통해 우연히 양 팔을 잃고,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은 재중 동포 소녀 김연화양의 사연을 알게 된 뒤 그녀를 국내로 초청해 의수를 제공하고 얼굴 성형수술을 지원해 방송국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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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오늘의 평화와 행복은 유공자 피와 땀의 결과

한국일보사가 1974년 창간 20주년 기념 사업으로 제정한 ‘한국보훈대상’이 올해부터 ‘서울보훈대상’으로 이름을 바꾸어 시상하게 되었다.

유서 깊은 서울보훈대상의 심사를 맡아 공적 내용을 확인해 나가는 과정은, 지구상에서 최단시간 내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우리 근대사가 헤쳐 온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자립정착에 성공해 단체회관에 목욕탕과 물리치료실을 마련하고 상이군경 뿐만 아니라 일반 장애인들에게까지 무료 이용을 시행하고 있는 중상이자의 성공신화가 있었고, 사재를 털어 기금을 조성해 평생토록 장학사업을 전개하는가 하면 사고로 양팔을 잃고 안면화상까지 겹친 중국 동포 자녀를 고국으로 초청해 의수는 물론 성형수술까지 해 줘 삶의 의욕을 되찾아 준 4월 혁명 주인공의 휴먼드라마가 있었다.

공적서를 넘기면서 나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의 평화와 내가 받고 있는 밥상 깊은 곳에 국가유공자와 그 유가족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다시 한번 이름 모를 산하에서 쓰러져 간 6월의 호국 영령들 앞에 삼가 옷깃을 여민다.

오기택 상임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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