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유럽연합(EU) 헌법에 해당하는 리스본 조약이 12일 실시된 아일랜드 국민투표에서 부결되면서 유럽 전역이 충격에 휩싸였다. '하나의 유럽'이란 정치적 통합을 꾀하려는 유럽연합의 꿈이 아일랜드의 벽을 넘지 못하고 또 다시 수포로 돌아가 정치ㆍ외교적 혼란이 가중될 전망이다. 리스본 조약이 발효되기 위해서는 EU 27개 회원국 만장일치의 동의가 필요한 데 아일랜드의 부결로 사실상 휴지조각이 됐기 때문이다.
리스본 조약은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국민투표에서 부결시킨 EU 헌법을 대체하기 위한 것으로 지난해 10월 EU 정상회의에서 진통 끝에 간신히 합의가 이뤄졌다. 논란이 된 EU 국기와 국가, 공휴일 등의 조항은 삭제하는 대신 EU 대통령과 외교총재직 신설 등 EU헌법의 핵심 내용은 그대로 담았다. EU의 오랜 숙원인 '하나의 유럽'이란 정치 통합의 발판인 조약인 것이다.
하지만 2005년에 이어 또 다시 조약 비준에 실패함으로써 EU로서도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됐다. 회원국이 수년동안 간신히 합의한 조약이 부결된 상황에서 다른 조약을 마련한다 하더라도 다시 통과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유럽 통합의 자신감이 그만큼 위축될 수 밖에 없다. BBC는 "유럽 정상들은 리스본 조약이 부결될 경우 EU가 어떤 대책을 취해야할지에 대해 아무런 대책을 마련해 두지 않았다"며 "리스본 조약이 부결됨으로써 유럽이 위기와 혼란을 겪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당장 프랑수아 피용 프랑스 총리는 "아일랜드 국민이 리스본 조약을 거부하면 당연히 리스본 조약은 무효다"고 말했지만, 장 피에르 주예 프랑스 국무장관은 "일단 나머지 국가들은 리스본 조약의 비준 절차를 계속 진행해야 한다"며 "그런 다음에 아일랜드와 최종적인 비준절차 문제를 협의하고 어떤 법적인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지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상반된 의견을 보였다. EU 정상들은 다음주 정상회의에서 대책을 논의할 예정이다.
아일랜드 정부도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됐다. 아일랜드를 제외한 26개 회원국들은 리스본 조약의 비준 부담을 덜기 위해 의회 비준을 선택했지만, 유일하게 아일랜드만 국민투표를 실시, 아일랜드의 국민투표가 리스본 조약 발효의 핵심 열쇠가 됐다. EU 인구 4억9,500만명의 1%도 못 되는 420만명의 아일랜드 인구가 EU의 정치적 통합을 가로막은 격이 됐다.
아일랜드는 1973년 EU가입 이후 9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을 구가하며 EU가입의 최대 수혜국으로 꼽힌 나라다. 하지만 올해 경제성장률이 1.5%으로 전망되는 등 경제상황이 악화하면서 리스본 조약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높아져왔다. 브라이언 코웬 총리와 주요 정당들은 리스본 조약이 국내에 추가적인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며 찬성했지만, 반대 진영은 리스본 조약이 아일랜드의 중립성, 세금 체제 등을 훼손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일랜드는 2001년에도 리스본 조약의 전 단계인 니스조약을 부결시킨 적이 있다. 코웬 총리는 10일 "경쟁이 치열한 시기에 아일랜드가 유럽에 등을 돌린다는 인상을 주면 안 된다"며 "아일랜드의 반대로 유럽 통합이 정체됐다는 비난을 듣지 말아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BBC는 아일랜드 유권자들이 "조약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투표에 무관심했다고 전했고, AFP통신은 조약에 반대하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투표 참여의지가 높았다고 분석했다.
김회경 기자 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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