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국제학교 브렌트(Brent)에 다니는 박모(12)군은 방과 후가 더 바쁘다.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장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알라방 지역 A영어학원으로 향한다.
박군은 책상 1개와 의자 2개만 달랑 놓인 좁은 방에 들어가 필리핀 출신 강사와 2시간 동안 1대 1 영어회화 수업을 한다. 처음엔 몇 마디 못 했지만 2개월이 지난 지금은 농담도 주고 받을 정도로 실력이 쑥 늘었다. "문법이 약하니 따로 보충해 달라"는 박군 엄마의 요청에 학원측은 문법도 가르친다.
■ 방과 후 학원으로 직행
학기 중에 영어학원은 보습학원도 겸하는게 일반적이다. 박군도 방과 후 2~3시간 동안 영어 수학 과학 역사 등 주요과목을 공부한다. 이해하지 못했던 수업 내용을 다시 정리하는 차원에서 교과서 위주의 복습이 이뤄진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직전에는 학원에서 자체 시험을 치르면서 집중 교육을 받는다.
한국식 보습학원 형태 그대로다. 이런 식으로 박군 엄마가 매달 지출하는 돈은 25만~30만원선. 물론 학원 수업이 전부는 아니다. 학원 봉고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박군은 저녁을 먹자마자 한국인 강사에게 수학 개인 과외를 받는다. 1주일 2~3번 수업에 비용은 40만~50만원 선이다.
과외가 없는 날도 쉬기 어렵다. 그런 날은 한글 학습지와 바이올린 레슨이 대기하고 있다. 과외가 끝날 때면 밤 9시가 훌쩍 넘는다. 박군은 "영어 일기를 쓰라"는 엄마 목소리를 듣고 찡그린 얼굴로 일기장을 편다. 박군은 "친구들하고 마음껏 놀 수 있는 주말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군 엄마가 매달 지출하는 사교육비는 학원비 30만원에 수학 개인과외 50만원, 여기에 한글, 바이올린 배우는 비용까지 포함하면 100만원을 훌쩍 넘는다. 자신이 별도로 배우는 영어 수강 비용까지 포함하면 지출은 더 늘어난다.
한국 뺨치는 사교육비가 지출되고 있는 셈이다. 박군 엄마는 "수업료만 내면 될 줄 알았는데 사교육비로 이렇게 많은 돈이 빠져나갈 줄은 몰랐다"며 "생활비는 줄일 수 있어도 교육비는 줄이기 힘든 상황"이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 급증하는 한국식 학원
조기유학생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필리핀은 영어학원과 한국식 보습학원도 크게 늘고 있다. 현지 업계에서는 수도 마닐라에 100여 개를 포함해 필리핀 전역에 최소한 150개 이상의 학원이 성업 중일 것으로 보고 있다. 학원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기다 보니 필리핀 이민국의 허가를 안 받고 영업을 하다 단속에 걸리는 학원도 적지 않다는 게 교민들 설명이다.
마닐라의 경우 조기유학 온 한국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오르티가스, 알라방 지역 등에 학원이 몰려 있다. 영어회화 학원부터 교과목 보습학원, 수학 전문학원, 한국복귀 준비학원, 미국 대학 진학을 돕는 SAT학원, 주니어토플 학원까지 세분화되고 전문화해 있다.
알라방 지역 C&C영어학원 이성희 원장은 "평소에는 수강생이 50~100명 정도 되지만 한국 방학 기간인 12월과 1월이나 7, 8월에는 단기캠프 수강생과 예비 입학생이 몰려와 150~200명까지 늘어난다"고 전했다. 사교육비는 입학 전에도 지출한다. 4~5개월 동안 매일 영어학원에 다니면서 6~7시간 동안 1대 1 영어회화를 하려면 50만~80만원을 내야 한다.
말레이시아 한인 밀집지역인 수도 쿠알라룸푸르 암팡 지역은 한국식 보습학원 10여 곳이 몰려있다. 하루 2시간 수업에 초등학생은 20만원, 중학생은 30만원 정도 들지만 3, 4시간 듣게 되면 비용은 50만원까지 뛴다. 학원 사무실에는 '수학의 정석' 교재와 한글로 된 영어 문법책도 보인다. 나머지 과목은 현지 학교 교과서를 복사해 강의 자료로 활용하고 있었다.
학원 관계자는 "말레이시아 학생도 학원에 다니지만 취약한 과목만 선별해 수강한다"며 "한국 학생처럼 '종합반' 형태로 매일 듣지는 않는게 보편화 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예상치 못한 사교육비는 유학생 가족에게 만만치 않은 경제적 부담을 주고 있다. 알라방 빌리지 2층 주택에 사는 학부모 김모(41)씨는 과도한 생활비 때문에 귀국까지 고려하고 있을 정도다. 임대료 200만원, 사교육비 100만원, 기본 생활비 100만원, 가정부 월급에 골프 비용까지 포함하면 매달 400만원 이상이 나간다.
최근 환율이 급등해 재정적 압박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김씨는 "남편한테 손 벌리기도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공부 그만 시키고 중간에 돌아갈 수도 없어 답답하다"고 말했다.
■ "명문학교 갈 수 있다면" 전학은 기본… 재수도
동남아에서도 한국 학부모들의 명문학교 진학 경쟁은 유별나다.
정점에 있는 명문 국제학교를 중심으로 학부모들에 의해 서열이 매겨져 있을 정도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미국계인 ISKL, 필리핀은 ISM과 브렌트, 태국은 영국계 사립학교인 해로우(Harrow)나 브롬스그로브(Broms Grove) 등을 명문으로 평가한다.
시설과 교사의 질은 우수하다는 평가가 많지만, 등록금은 다른 학교보다 훨씬 비싸 연간 1,000만~3,000만원에 달한다. 필리핀 학원업계에서는 "장기 체류하기로 마음 먹는 학부모들의 명문학교 경쟁이 더 치열하다"고 전했다.
첫 해에는 영어 실력 때문에 대다수 조기유학생들이 명문 국제학교 정규 과정에 입학하기 어렵다. 필리핀의 경우 일반 사립학교에 입학해 필리핀 학교시스템이나 교과과정에 적응한 뒤 명문 사립학교나 국제학교로 전학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학원에서 장시간 공부하면서 때가 되면 명문학교 문을 노크하는 것이다. 그러나 입학 시험이 까다로워 한번 떨어지면 재시험 일정을 잡고 재도전하거나, 인맥을 통해 '뒷구멍'으로 입학시키려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학교에서 학과목 점수를 꼼꼼히 따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고액 개인과외를 통해 교과목 점수를 올리거나 영어실력을 높이려는 경우도 있다. 마닐라에서 만난 한 가디언(현지 보호자)은 "학부모와 같이 거주하는 않으면 입학을 허가하지 않는 경우도 있어 인터뷰 때에 맞춰 학부모가 입국하는 편법도 동원된다"고 설명했다.
동남아 학교 대부분은 3, 4개 과목 이상 성적이 70점 대 이하면 진급을 못하는 유급제도가 있다. 이 때문에 조기유학생 입장에서는 명문학교 입학 후에도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다.
필리핀 사립학교 우드로즈(Woodrose)에 초등학교 딸이 다니는 황모씨는 "고학년으로 갈수록 교과목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점수 미달로 유급 될 확률이 높아진다"며 "한 반에 자기보다 한두 살 많은 학생과 수업을 같이 듣는 경우도 흔하다"고 말했다. 유급되면 여름방학 기간 '써머 클래스'를 통해 보충하거나 학교를 옮겨 다음 학년으로 배정 받기도 한다.
동남아까지 가서 명문학교 진학 경쟁을 벌이는 것은 대학 진학에 유리하다는 실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만족감도 한몫하고 있다. 현지 교육 전문가들은 "명문학교라고 해서 다른 학교보다 커리큘럼이나 교육의 질이 월등히 우수한 것은 아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필리핀의 한 보습학원 원장은 "한국 학부모들은 일반고, 외국어고 따지듯 자체적으로 학교를 구분해 진학 경쟁을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입학하기 힘든 학교에 비싼 돈 내고 다니는 만큼 대접 받고 싶은 욕구가 짙게 깔려있다는 의미다.
심지어 '물 관리' 차원에서 한국 학생들을 더 이상 못 받도록 학교에 압력을 행사하는 사례도 있다. 현지 유학전문가는 "입학할 때까진 자기 아들 받아달라고 학교에 사정하다가 막상 들어가면 학부모 태도가 확 달라지기도 한다"고 전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자녀를 교사가 함부로 대한다며 항의하거나 반을 옮겨 달라고 요구하고, 발음 좋은 원어민 교사로 담임을 바꿔 달라는 주문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마닐라ㆍ쿠알라룸푸르=강철원 기자 str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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