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직장 어느 조직이든 전임자를 어떻게 대우하는가에 따라 그곳의 문화가 달라진다. 인수인계를 잘 하고 전임자를 잘 대우해 줘야 자신도 나중에 대우를 받고 그 조직이 건강하게 발전한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임자를 대우하기는커녕 깎아 내리거나 아예 그 판에서 추방 축출하는 사례가 더 많다. 이명박 정부처럼 ‘잃어버린 10년’을 거쳐 정권을 탈환한 경우, 전임자가 해온 일과 그 방식은 배척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부시가 ABC(Anything but Clinton), 즉 클린턴과 반대로 한 것처럼 이명박 대통령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반대로 ABR(Anything but Roh)의 자세로 일해왔다.
쇠고기가 일깨운 반성과 쇄신
그러나 미국산 쇠고기 협상 문제는 일대 반성과 쇄신을 요구하는 계기가 됐다. 국민의 신뢰를 잃어 새 판을 짤 수밖에 없게 된 이 대통령이 먼저 한 일은 원로들과의 대화였다. 주로 종교계 인사들을 차례로 만났는데, 그들이 원로의 전부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나눈 의견에 뭐 대단한 게 있더냐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한 가지 의아스러운 점은 전직 대통령들과는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 만한 국가 원로가 또 어디 있나. 그들이라고 말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란 어차피 모양새이며 전직 대통령과 차례로, 또는 함께 만나 국가 위기를 논하고 진로를 모색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6ㆍ15선언 8주년을 맞아 “정부가 6ㆍ15와 10ㆍ4선언을 계승할 것을 분명히 선언해 북한에 믿음과 회담 복귀의 명분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주장도 경청해야 한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과 왜 만나지 않는가. 그를 만나야 할 이유는 많다. 참여정부의 마지막 외교부장관이었던 송민순 의원에 의하면 노 전 대통령은 쇠고기 문제로 고심을 많이 했다. 작년 말 한덕수 총리와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등은 “30개월 미만의 쇠고기를 수입하되 뼛조각을 허용하고 SRM(특정위험물질)을 제외하는 방향으로 FTA 타결을 위한 길을 터 주자”고 건의했다. 노 전 대통령이 “그렇게 하면 FTA 비준에 다른 지장요소는 없느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다고 한미FTA가 되는 게 아니니 민감성을 감안해 다음 정부로 넘기자는 게 노 전 대통령의 입장이었고, 당선자 자격으로 방문한 이 대통령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이다. 비겁하게 미루며 꼼수를 썼다고 비난하는 여론도 있지만, 송 의원의 말에 더 신뢰가 간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덜컥 협상을 마무리 지은 것은 그처럼 어렵고 민감한 문제라는 학습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학습은 직접 경험이 없다면 전임자나 전 정부와의 충실한 인수인계를 통해 얻을 수 있다. 경과를 무시하고 “그 때(노무현 정부) 처리했으면 이런 말썽이 안 났지”라는 식의 ‘설거지론’을 편 것은 잘못이다. 무엇이 뇌관인지 어디가 지뢰밭인지 충분히 알았어야 했다.
국정 전반의 대화와 소통 필요
이 대통령의 취임 100일은 노 전 대통령에게는 퇴임 100일이다. 그는 말을 아끼며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금도와 사려, 분별을 보이고 있다. 우리 정치ㆍ민중세력에서 지분이 아주 큰 그와 만나 이야기하는 것은 손해 나는 일이 전혀 아니다. 국정 운영에 대해, 새로 짤 내각에 대해, 기용해야 할 인사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 의견을 구하는 것은 보기에도 좋을 것이다. 만남에 응하고 안 응하고는 그의 선택이지만 정치에서는 명분이 옳은 사람이 국민의 마음을 사게 돼 있다.
어떤 사회든 나선형 계단처럼 발전해 나가는 것이지 헬리콥터처럼 수직 상승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선형은 전임자와 소통하는 구조다. 그런데 발전을 위한 대화ㆍ소통은커녕 아직도 청와대 자료를 불법 유출했네 안 했네 하는 식의 논란이나 벌이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임철순 주필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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