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생활은)다 조하요(좋아요)….”(웃음)
외국인 며느리의 입가에 흐르던 엷은 미소는 오래 가지 않았다. 말끝도 흐릿해졌다. 멋쩍은 듯 연방 웃음을 지어보지만, 시선은 자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언제부턴가 마당을 서성이며 신기한 표정으로 며느리의 인터뷰 모습을 흘깃거리던 시어머니(74)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베트남서는 볼 수 없는 사계절이 있슨께 좋은 거겠지 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시어머니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남의 나라에 와서 어른들 모시고, 아기도 낳고 잘 사는 것 보면 이뻐 죽겄어. 역시 우리 며느리가 최고랑께. 허허.”
시어머니의 너스레 웃음에 드디어 며느리의 말문이 터졌다. 청산유수다. “음… 베트남 음식,이젠 시러요(싫어요). 먹기 시러요. 된장, 김치찌개가 더 조하요. 특히 기름에 부쳐서 만든 부침개는 완전 조하해요. 아, 우리 (시)어머니도 당근 조하요.”
까무잡잡한 피부에 짙은 쌍꺼풀을 가진 쯩티 베론(25)씨. 그는 베트남에서 전남 광양시 다압면으로 시집온 결혼이주 여성이다. 올해 결혼 4년차인 그는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이라는 시집살이 의미를 터득할 정도로 한국 가족문화에 대한 적응속도가 빠르다. “아이를 셋(남편과 아들, 딸) 키우고 있다”, “사는 게 전쟁”이라고 말하는 그의 입담과 푸념은 영락없이 한국 아줌마다. 그러나 그의 ‘한국 아줌마 되기’까지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베트남 최대 농수산물 집산지인 칸터시의 가난한 농가에서 1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난 베론씨는 여느 베트남 신부처럼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2005년 9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앞서 두 달 전 베트남 호치민시에서 30여분의 짧은 맞선을 보고 결혼식을 올린 뒤 먼저 한국으로 떠난 남편 정지열(44)씨를 뒤따라 나선 것이다.
하지만 꿈에 부풀었던 한국 생활은 낯설고 물설은 광양 백운산 밑자락의 시댁에 도착하면서부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힘든 농사일과 시집살이를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냉혹했다.
구더기가 들끓는 재래식 화장실과 아궁이에 군불을 때고 생활하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TV드라마를 통해 보던 한국 가정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허탈한 마음을 채 가라앉히기도 전에 힘든 시집살이가 시작됐다.
시댁에 도착한 이튿날부터 산에 올라가 밤을 따고 녹차 잎을 뜯어야 했다. 숲이 우거진 산을 난생 처음 보는 터라 겁이 덜컥 나면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하지만 “산에 못 올라가겠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임신을 해 배가 부른 상태에서도 산을 타며 매실과 감을 따고, 고사리를 캐야 했다. 고된 하루를 보낸 뒤 잠자리에 들어 베갯잇을 적시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다시 (베트남)집으로 가고 시퍼써요(싶었어요). 어떠케(어떻게) 이런 곳에 사나 시퍼써요. 산에서 빨리 내려가고 시퍼 일을 빨리빨리 하니까, ‘손놀림이 조타(좋다)’ ‘일 잘한다’고 칭찬해써요(했어요). 정말 그때는 미치는 줄 아라써요(알았어요). 지금도 산을 타는 건 시러요.”
베트남과 전혀 다른 한국의 예절과 음식, 풍습 등 문화적 차이는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게다가 말이 통하지 않아 부부싸움이 잦아지면서 외로움은 깊어만 갔다. 한국말도 거의 혼자 귀동냥식으로 배워야 했다. 언어 소통과 사회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농사일과 시부모 모시기가 한국 생활의 전부였다.
‘내가 뭣 때문에 한국에 왔을까?’ 서글픈 후회가 밀려들 때마다 남편과 시부모 몰래 전화기를 들었다. “엄마, 못 쌀게써요(살겠어요). 엄마 보고 시퍼요. 집으로 돌아가고 시퍼요.” 베트남에 있는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이역만리 한국 생활의 애환을 털어 놓으며 울먹였다.
“안돼! 이혼은 절대 안 된다. 뱃속의 아이를 생각해라. 얘야, 참아라.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단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친정 엄마의 가냘픈 목소리에는 매번 물기가 서려 있었다.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게 남편과 시부모 주위만 빙빙 돌던 그에게 ‘한국’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포스코 광양제철소 직원들로 구성된 ‘프렌즈 봉사단’이 2006년 6월 그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베론씨는 이 때 한국 생활이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정해진 운명이라는 걸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혼이주 여성의 한국 정착을 돕던 프렌즈 봉사단은 베론씨에게 삶의 온기를 불어 넣어준 ‘친구’였다. 베론씨가 혼자 짊어지고 있던 ‘한국 생활 적응’이라는 무거운 짐을 가족들과 함께 나눠 졌고, 봉사단 회원 부인들도 베론씨 후견인을 자처하며 한국 음식 만들기와 같은 전통문화 체험, 가정방문 일손 돕기, 결혼식 올려주기, 출산 도우미 등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주변에 도움을 청하거나 어려움을 호소하는데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베론씨도 점차 긍정적인 태도로 바뀌기 시작했다. “힘들다. 도와달라”며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먼저 다가갔고, 가족들도 그 동안 몰랐던 베론씨의 아픔을 이해하게 됐다. 고달픈 시집살이 1년 만이었다. 이 무렵 큰아들 상민(2)이를 얻는 기쁨을 맛봤고, 이해하기 힘들었던 한국인의 ‘정’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시)어머니 나이가 칠십 너머요(넘어요). 근데 아침밥 직접 해서 며느리인 저에게 바쳐요.(웃음) 상민이와 이제 배길(백일) 지난 둘째 딸 민서 키우느라 힘들 거라고 (아침밥을) 모타게(못하게) 해요. 고맙고 미안해요. 아마 그게 한국 사람이 말하는 ‘정’ 가타요(같아요).”
한국인의 ‘정’을 알게 된 그는 가정으로 한정됐던 활동영역을 점차 밖으로 확대하면서 친교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매달 1차례 같은 마을에 사는 베트남 며느리들을 불러 한국 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으며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와 적응을 돕는 맏언니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덕분에 자신이 이방인이 아닌 지역사회의 일원이라는 책임의식도 갖게 됐다.
“외국에서 여기 농촌에 시집 온 사람에게 빨리 한국사람 되라고 하면 안 돼요. 서로 다른 문화 이해하고 마처(맞춰) 가야 해요. 한국 예절 소개하고, 한글 가르쳐주는 교육기관 마니(많이) 마니 피로(필요)해요. 빨리 우리 2세 교육 위해서도 절씨래요(절실해요).” 베론씨는 이제 ‘한국의 며느리이자 아줌마’가 다 됐다.
광양=안경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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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코 '프렌즈 봉사단'
포스코 광양제철소 ‘프렌즈 봉사단’은 2003년 3월 생산기술부 직원들이 조직한 자생적인 봉사활동 그룹이다. 현재 생산기술부 직원 330명 가운데 90%가 넘는 315명이 소속돼 활동할 정도로 이웃사랑 실천과 사회봉사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프렌즈 봉사단이 내걸고 있는 봉사활동 모토는 크게 두 가지. 소외계층 중에서도 지원 사각지대에 놓인 불우이웃에 대한 나눔 문화 확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역 공동체 형성이다.
박근수 봉사단장은 “대부분의 봉사활동이 특정 소외계층에 편중돼 또 다른 소외를 낳는 경우가 많다”며 “남들이 하지 않는 영역을 찾아 사랑 나눔을 실천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실제 프렌즈 봉사단이 도움을 주는 대상은 일반 봉사단체와는 차이가 난다. 다문화 가정 돕기가 대표적이다. 결혼이주 여성들의 국내 정착을 돕기 위해 친정 보내주기와 합동결혼식 개최, 한국문화 체험, 농번기 일손 돕기 등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다.
외국인 근로자들의 고충 상담을 통해 한국의 ‘정(情)’ 문화 확산을 시도하는 활동도 눈에 띈다. 프렌즈 봉사단은 월급을 떼이거나 불법 체류로 불이익을 받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해 직접 고용주를 만나 밀린 월급을 받아주고 관공서를 함께 찾아가는 등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특히 추석과 설 명절에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가정에 초대하고 나눔의 체육대회를 여는 등 한국에 대해 따뜻한 이미지를 심느라 애쓰고 있다.
조손(祖孫ㆍ할아버지와 손자)가정 지원사업에도 힘을 쏟고 있다. 2004년부터 경남 남해군 남면과 자매결연을 맺고 이 지역 조손가정 아이들에게 학용품과 학습 지원 등 도움의 손길을 주고 있다.
포스코 광양제철소 관계자는 “프렌즈 봉사단의 사랑 나누기는 이미 상시적인 기업 활동의 일부로 뿌리 내렸다”면서 “앞으로도 사랑 나눔을 통해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밝게 비추고 아름다운 지역사회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광양=안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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