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를 주도하고 있는 '광우병 국민대책회의'가 남모를 고민에 빠졌다. 당초 미국산 쇠고기 반대에만 국한됐던 집회 성격이 '반정부 집회'로 기운데 이어, '반미(反美)' 색채 또한 농후해질 기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집회의 순수성을 지키려면 반미 이슈의 등장을 막아야 하지만 워낙 다양한 단체가 참여하는 만큼 묘수를 찾을 수 없다는 데 주최 측의 고민이 있다.
12일 대책회의와 주요 시민단체에 따르면 효순ㆍ미선양 6주기인 13일을 고비로 '반미'가 촛불집회의 핵심 이슈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대책회의는 11일과 12일 약 1,000명에 머물렀던 집회 참가자가 13일에는 5만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는데, 5만명 가운데 상당수가 반미 성향 단체 회원들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2002년 미선ㆍ효순이가 억울하게 희생된 사고 현장에 추모비를 세우고 시청앞 서울광장에 갈 것"이라고 말해 '반미'가 13일 집회의 주요 구호가 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대책회의 정대현 언론팀장도 "대책회의는 국민의 뜻을 대표하는 단체"라며 "미국이 재협상 의지를 보이지 않고, 미국 비판론이 대세가 된다면 우리의 공식 입장도 반미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경찰도 남북공동선언 8주년인 15일 이후 촛불집회가 '반미 집회'로 바뀔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미국이 여전히 재협상을 반대하고 있는 가운데 남북의 자주적 협력을 중시하는 계층을 중심으로 '반미'가 주요 이슈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실제 12일 낮부터 시청앞 서울광장에는 반미적 내용의 유인물이 등장했다. '6ㆍ15 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서울통일연대'라는 단체는 이날 '광우병 소를 계속 들이대는 미국에 맞서 촛불은 계속돼야 한다'는 제목의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유인물에는 '동맹이 아니라 상전인줄 아는 미국, 동맹이 아니라 하인인줄 착각하는 이명박 대통령을 국민의 힘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전세계에서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한 미국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한미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우리의 식량주권을 내줄 필요는 없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주최 측은 드러내진 않지만 '반미'와 일정 거리를 두려는 모습이다. 집회의 이슈를 '전면 재협상', '이명박 정부 심판'에 집중시키기 위해 13일 집회의 공식 명칭에서 효순ㆍ미선양을 배제하고, 추모행사도 간략하게 지내기로 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해석된다.
대책회의 관계자는 "반미보다는 쇠고기와 교육 자율화, 공기업 민영화, 대운하 건설 등 이명박 정권에 대한 비판이 중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관계자도 "효순ㆍ미선양에 대한 대대적인 추모행사 대신 간략한 묵념으로 대신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촛불집회가 반미집회로 변할 경우, 촛불집회가 그동안 이룬 성과가 상당히 퇴색할 것"이라고 말했다.
허정헌 기자 권지윤기자
■ 효순양 아버지·미선양 할머니/ "우리 애들과 쇠고기 연관짓지 말았으면"
"우리 효순이와 미선이를 쇠고기와 연관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가 13일 촛불집회에서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고(故) 신효순ㆍ심미선양의 6주기 추모행사를 함께 진행하려는 것에 대해 효순양 아버지 신현수(54)씨와 미선양 할머니 윤석금(74)씨 등 유족들은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12일 오후 경기 양주군 광덕면 자신의 고추밭에서 일을 하다 기자와 만난 신씨는 "국민들이 내일 잊지 않고 추모집회를 연다는데, 감사하지만 이제는 그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신씨는 심경이 복잡한 듯 '할말이 없다' '죄송할 따름이다'며 정식 인터뷰를 거듭 사양했으나, '촛불집회와 미국산 쇠고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분명한 어조로 "쇠고기와 효순이를 연결짓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다음은 신씨, 윤씨와의 일문일답.
- 내일 서울에서 추모집회가 열린다는데.
"잊지 않고 기억해주시니 감사하고 죄송할 뿐이다. 그러나 효순이 미선이하고 쇠고기하고 연관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딸을 먼저 보낸 아버지 마음이 너무 힘들다. 부모도 3년상이면 도리를 다하는 것인데,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
-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언론에서도 쇠고기와 효순이를 연결 지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젠 정말 할 말이 없다."
- 언론에서 많이 찾아오지 않았나.
"전화가 많이 왔으나, 아무 말도 안했다."
- 내일 미선이를 추모하러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로 했다.
(윤씨)"기억해 주는 것 감사하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만 기억해 줬으면 한다. 사랑하는 손녀를 먼저 보내고, 이렇게 생각날 때마다 너무 힘들다."
- 촛불집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윤씨)"사람들이 많이 나온 것은 TV를 통해 알고 있다. 나는 늙어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른다."
윤재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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