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 듯 나와 혜민이는 어렸을 때부터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던 친자매 같은 존재다. 초등학교 때부터 김원도장에서 동문수학하며 인생의 반 이상을 함께 했다.
연구생 시절 김혜민, 한상훈, 홍성지 그리고 나의 부모님이 교대로 차를 태워 주시곤 했는데 어느날 시간이 안 맞아 한국기원에서 귀가하는 길에 둘이 같이 전철을 탔다. 타자마자 '나라이름 대기'를 시작했다.
서로 번갈아 하나씩 나라 이름을 대다가 막히는 사람이 지는 게임인데 우리는 여기에 온 정신을 쏟는 바람에 그만 한 바퀴 돌아서 도로 상왕십리역까지 오고 말았다. 결국 4시간 만에 집에 와선 또 사회부도 책을 펼쳐 놓고 지구상에 어떤 나라들이 있는지 열심히 외웠다. 그 때의 집중력과 몰두력이 어른이 된 지금 너무나 그립다.
요즘 웰빙시대라지만 우리 김혜민은 그런 거 절대 신경 안 쓴다. 야채는 무시하고 주스도 별로 마시지 않는다. 평생 라면만 먹어도 살 수 있다는 혜민. 가끔 시합을 져서 우울한 날엔 삼겹살 사 주면 금방 풀린다.
혜민이의 별명은 대충 오백 개쯤 된다. 그만큼 남들에게 친근하고 편하고 거리감이 없다는 것. '거북이'가 가장 많이 불리는 별명이다. 혹시 인터넷바둑사이트에서 거북 뭐시기가 들어가는 아이디를 보면 한 번쯤 의심해 보시길. 그 뿐 아니라 '잠만보', '피오나공주', '거만', '거순', '이범수', '깜꼬', '꼬북이' 등등 무슨 뜻인지도 모를 요상한 별명이 진짜 많다.
항상 잘 웃고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고 누구에게나 배려심 있고 착한 혜민인 인기쟁이다. 나는 하면 제대로 하든가, 아님 아예 안 하든가 둘 중 하나지만 혜민인 언제나 '편하게 즐겁게'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며 자랐는데 이것만큼은 정반대다. 서로 반씩 섞이면 딱 좋을 것 같은데 그게 잘 안 된다.
요즘 대리배 준우승, 정관장배 국가대표 등등 꾸준히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 혜민. 그러나 나는 네가 조금은 더 독해졌으면 좋겠다.
현재가 행복하고, 앞으로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좀 천천히 즐기며 가고 싶다는 네 말도 백 번 이해가 가. 우리는 프로 기사이기 이전에 20대 여성이다. 승부에 미치면 포기해야 하는 게 너무나 많다는 게 때로는 참담하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같이 손잡고 나아가고 싶은 소망이 있다. 그래서 세계 대회도 같이 다니고, 같이 실력으로 인정 받고 싶다. 이 글 보고 조금만 더 독해졌으면 좋겠다.
앞으로 지겨울 정도로 같이 있을 나의 죽마고우야. 우리 앞에 있을 창창한 미래를 훨훨 날아 보자구. 저~어기 세돌이 오빠랑 창호 사범님 있는 곳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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