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개혁은 신속성이 생명이라는 게 정부의 판단이었다. 정권 초기에 속도를 내서 밀어붙이지 않으면, 임기 내내 불가능할 거라는 인식이었다. 과거 정부의 공기업 개혁 실패에 대한 반면교사였다.
하지만 정부 스스로 속도 조절에 나섰다. 잘 달리던 공기업 개혁안에 급 브레이크를 밟았다. 공기업 개혁안이 가뜩이나 불안한 국정에 폭탄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 탓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10일 “타이밍을 조율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국정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발표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당초 6월 초ㆍ중순으로 예상됐던 발표 시점은 7월 초순으로 늦춰졌고, 이젠 이 일정조차도 무의미해졌다. 현재로선 기약이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공기업 개혁 앞에 버티고 선 것은 촛불집회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로 시작된 집회의 성격은 이제 반(反) 정부 집회로 바뀌었고, 언제부턴가 공기업 민영화 반대 등의 정치적 구호가 가세했다. 심지어 인터넷을 통해 “공기업 민영화로 하루 수돗물 가격이 14만원에 달할 수 있다” “감기 치료비가 10만원에 달할 것이다” 등 ‘민영화 괴담’이 급속히 확산되기도 했다.
공기업 개혁은 관련 부처의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것은 물론, 320여개 공공기관에 몸 담고 있는 수십만 명 직원들의 생존과 직결된 사안.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개혁 방안을 내놓았다가 엄청난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무작정 발표했다가는 거리의 촛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고민은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도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애초 우려했듯, 시간이 지연되면 될수록 이해집단의 로비도 거세지면서 개혁 방안이 누더기가 될 거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실제로 개혁방안은 갈수록 후퇴하는 양상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제주공항 민영화다. 청와대와 정부는 당초 수익성이 높은 제주공항을 민영화 대상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제주도민 등 이해 관계자들의 거센 반발에 시달렸고, 결국 민영화 방침을 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책연구기관 한 관계자는 “제주공항 민영화가 최선인지, 아니면 공공성을 유지하는 것이 나은지는 확실치 않다”며 “하지만, 정부 나름의 철학과 원칙에 기초해 마련됐을 개혁안이 이해집단의 로비와 반발로 무산된다는 것 자체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연구기관 통폐합도 관계 기관들의 반발로 내홍을 겪고 있고, 청산으로 가닥을 잡았던 석탄공사도 일단 존속하는 쪽으로 다시 방향을 선회했다.
새 정부 초기 의기양양하게 시작했던 공기업 개혁은 이제 중대 기로에 섰다. 마냥 늦출 수도 없고, 폭탄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터트릴 수도 없는 딜레마다. 촛불집회가 공기업 노조의 대규모 하투(夏鬪)로 이어지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서, 앞으로도 정부가 훨씬 더 많이 물러서야 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다시 용두사미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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