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 의회의 초선의원들에게 중요한 골치거리의 하나는 상임위원회 배정이다. 어떤 상임위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지역구민들을 위한 활동과 정치자금 모금에서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상임위원회 중 초선의원이 들어가기 힘든 위원회가 두 곳 있다. 바로 세입위원회 (Ways & Means Committee)와 세출위원회(Appropriations Committee)인데, 세입위는 세금을 확정하는 위원회이고, 세출위는 책정된 예산을 어디에 쓸지를 결정한다. 이들 위원회 위원장은 항상 남아 돌아가는 자금을 당에 헌납함으로써 당내 위치도 강력해지기 마련이다.
의원들은 각자 상임위 2개, 그리고 적어도 4개의 소 분과위원회에 속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 두 위원회에 초선의원이 들어가기란 보통 힘든 게 아니다. 가끔 초선의원이 들어갈 때도 있지만 그 것은 몇 년 동안 어느 특정 주를 대표하는 의원이 없었을 때와 같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정치자금이 가장 안 들어오는 위원회가 중소기업위원회, 다음이 외교분과위원회, DC 위원회(워싱턴 DC의 예산을 도와주는 위원회) 등이다. 나도 초선 때 중소기업위에 있었고, 상임위는 건교위에 속했다.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엔지니어 회사를 운영했던 경험 때문이다.
의원들은 종종 조용히 주로 로비스트를 상대로 모금운동을 펼친다. 모금파티 장소는 의사당 길 건너편 공화당 당사 옆에 붙은 공화당 빌딩이다. 며칠 동안 의원들이 직접 로비스트를 상대로 전화를 해야 한다.
모금운동 전화는 국회 사무실에선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공화당 빌딩 내 한 칸도 안 되는 작은 방에서 문을 닫고 며칠 동안 전화를 한다. 대개 1인당 1,000달러 정도씩 기부하고, 3만 달러 정도면 대성공이다.
앞서 말한 두 위원회 위원장들은 한번에 20~30만 달러씩 선거자금이 들어온다. 초선의원들은 모금운동 리셉션도 공화당 빌딩 3층의 조그만 골방에서 하고, 두 위원회 위원장들은 아래층의 커다란 메인 리셉션 홀을 사용한다. 재선이 됐을 때는 외교분과위원회 산하 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로 옮겼다.
당시 한국에서 국회의원들이 10명 남짓씩 워싱턴에 자주 왔다. 방문 목적은 대개 주미대사관에 대한 국정감사 등이었고 한국 이민 1세가 미국 국회의원이라니 으레 나를 찾았다. 결국 한미의원 친목회를 조직해 미국 쪽은 내가, 한국 쪽은 오모 의원이 대표로 뽑혔다.
만날 때마다 이 분들이 나누는 대화에 난 항상 환상에 사로잡혔다. 예를 들면 대사관의 국정감사다. 이들의 말로는 대사관이 발칵 뒤집히고, 대사관의 참사, 공사는 말할 것 없고 대사까지도 쩔쩔맨다. 나는 속으로 ‘미국 의회도 해외공관을 감사할 수 있는 제도가 있으면 얼마나 신이 날까’ 하는 부러운 마음이 생겼다.
이 분들 중 몇몇은 내 국회 사무실에 급히 여장을 풀고 여행 가방을 맡겨두는 경우도 많았다. 어딜 그리 급히 가느냐고 물었더니 도착하자마자 골프를 하는 것이 시차를 극복하는 데 최고의 약이란 얘기를 했다. 저녁식사 때 만나면 뉴욕의 동창들이 베풀어준 성공적인 모금운동 결과를 자랑한다. 5만 달러를 모았다는 얘기도 들었고 귀국할 때쯤이면 꽤 많은 현금을 짭짤하게 챙겨 간다는 것이다.
한미 의원친목회는 미 의회 의원이 나까지 포함해 4명 남짓, 한국 국회의원은 약 15명 정도였다. 한번은 이 분들이 도착한 지 열흘이 지나도록 전혀 연결이 안됐다. 나도 바빴기 때문에 ‘언제고 연락이 오겠지’하고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후 늦게 별안간 전화가 왔다. “아니 그동안 소식이 없어서 궁금했습니다.” 내가 물었다. “응. 그동안 너무 바빴어. 헌데 중요한 부탁이 있는데 김 의원께서 꼭 들어줘야 하는데.” 그분이 내게는 선배라 깍듯한 존댓말은 쓰지 않았다. 영어는 존댓말, 반말이 따로 없어서 따뜻한 정은 없다.
“그 중요한 부탁이 뭡니까.” “이건 정말 부탁인데 꼭 들어주지 않으면 큰일이야. 내일 낮 비행기로 우리 모두 귀국하는데 내일 아침 하원의장 뉴트 깅그리치를 잠시 만날 수 있게 해줘야 할 텐데.”
“아니 진작 말씀하시지 별안간 내일 아침 일찍 만나게 해달라고 서두르십니까.” “아 글쎄, 대사관이 알아서 다 해줄 걸로 알았는데 오늘에서야 안됐다고 하니 기가 막힌 일이야.” 잠깐만, 한 10분 동안 인사만 하게 해 달라는 간곡한 요청이었다.
다음날 아침 9시에 국회가 개원할 때 깅그리치 의장이 개회를 선언해야 하기 때문에 오전 8시30분 정각에 의장실에서 접견하도록 스케줄을 짜는데 성공했다. 다음날 아침 8시20분쯤 의장실에 가보니 12명의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아침 8시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8시30분에 깅그리치 의장이 응접실에 나타나자 악수들을 나눴다. 깅그리치 의장은 환영인사와 함께 8시55분?의사당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서로 대화를 나눌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달리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깅그리치와 단 둘이 찍는 사진, 여당 의원들끼리 찍는 사진, 야당 의원들끼리 찍는 사진, 여당 야당 팀장님들끼리 찍는 사진. 사진찍는 데 시간을 다 보내고 한 마디의 대화도 없이 헤어졌다.
이튿날 한국의 일간 신문에 이 분들의 귀국과 함께 인터뷰 내용이 앞 면에 크게 기재됐다. 깅그리치 의장과의 거의 한 시간 가까운 면담에서 한미 방위조약 등 다양한 현안들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는 내용이다. 내가 현장에 있었는데…
혹시 ‘내가 없었을 때 이런 신중한 의견교환이 있었나’하고 의장실에 전화를 했다. 따로 만난 적은 없고 그날 아침 사진촬영이 전부였다는 답변이다. 한국에 장거리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김 의원, 못 들은 척 하고 그냥 넘기시게. 그렇다고 사진만 찍고 왔다고 말할 순 없잖아. 다음에 한국에 올 때 화끈하게 대접할 테니 못들은 걸로 하게.”
작은 실수도 용서가 없는 미국사회 속에서 너무도 오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와 조용필의 ‘허공’이란 노래를 반복해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허탈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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